② ‘이자스민’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많은 놀라움의 시선들이 있었음에도 '드디어 원래의 자리를 찾아왔다'는 많은 환영의 이야기가 더욱 많았기에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이자스민 위원장의 정의당과 함께하는 '이주 사회로의 전환 준비'를 기대하며, 이자스민 이주민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소개하는 그 두 번째 이야기.
‘이자스민’이라서 왜곡되었던 이야기
그렇다. 계속 똑같은 부분만 반복적으로 올라오니까.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이주아동권리기본보장법이었다. 사실 그 법은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법이다. 게다가 사실상 우리나라 아동법에 이미 들어가 있었던 내용이었고. 우리가 UN아동권리 협약에 가입을 하고 비준까지 했던 나란데, 그것에 대한 시행은 없었다. 가입은 되어 있었지만, 아무것도 안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비준까지 했던 나란데, 당연히 해야 할 것을 안 하고 있어서 하자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외국인을 위한, 미등록자들을 키우기 위한 법안으로 여겼다. 이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관련기사 첨부: [경남도민일보 2019년 05월 29일자] 미등록 이주아동 인권 실태 (4) 왜 보호받지 못하나)
맞다. ‘애를 낳으면 한국을 안 나가게 되니까 낸 거 아니냐?’는 말이 많았는데 그게 아니다. 이건 어른을 위한 법안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18세 미만 아이들을 위한 법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을 새로 만든 것도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우리가 UN에서 권고를 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담았다. UN아동권리협약에 가입하고 비준을 했던 나라들이 다뤘던 그런 내용일 뿐이다. 게다가 나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라, 30개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만들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게 어떻게 해서 이렇게 왜곡이 됐는지, 18대 국회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나왔을 때는 이렇게까지 크게 화제가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런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내놓고 난 후에는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하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난 이중 국적도 아니고, 한국 국적의 한국인이다. 필리핀을 위한 활동을 해서, 필리핀으로 가서 정치인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필리핀태풍피해 결의안과 같은 경우는 누구나 다 낸다. 어느 국회의원이나 다 내는 것이다. 결의안이라는 것은 법안은 아니고 촉구를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재량적으로 바라보면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아이티에 지진이 났을 때도 그렇고 인도네시아에도 그렇고, 일본에도 재해가 있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지원을 하기 위해 모든 국회의원들이 결의안을 냈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는 필리핀에 큰 슈퍼태풍이 온 것이 처음이었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았었다. 그런데도 나는 처음 그것을 접했을 때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동료 국회의원들이 “필리핀에 그런 재해가 발생했는데 결의안도 안 내?”그러는 거다. 이자스민 의원이 없었으면 너나나나 결의안을 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왕이면 필리핀이 모국인 국회의원이 있으니, 내가 내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해 다들 눈치를 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그런데 이게 인도적 차원에서 맞는 이야기겠지만 속으로는 열 번 백 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게 내가 하는 게 맞나?’, ‘내가 하게 되면 사람들은 더 괜한 오해를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옆에서 설득을 해서 내가 결의안을 작성해서 내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옆에서 '이거 해라, 해야 한다. 피해가 커지고 있는데'라고 설득을 해서 결의안을 작성해서 내게 되었다. 결의안을 작성해서 내게 됐는데, 사실 그것도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일반 결의안이랑 옛날에 나온 결의안이랑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 놨었다. 그때 사인을 받고 막상 발의를 했을 때. 사실상 내 결의안이 통과가 된 것은 아니다. 여야가 합의한 그런 결의안을 만들어서 내 결의안이 가지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결의안이 통과가 되게 된 것이다. 그때 당시 200~300명 가까운 거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사인을 했던 그런 결의안이었는데. 그런데 ‘내가 썼던 결의안은 왜 화제가 되고, 두 양당이 썼던 결의안은 문제가 안 됐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맞다.
반대 한다. 그런데 반대하는 이유가 ‘국회’에 건립하는 것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회에 건립하면 누굴 보여줄 수가 있나? 외국 인사들은 아주 가끔 정치인들만 방문할 뿐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으로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도 얘기를 했지만 할 거면 예를 들어 광화문 같은 곳에 해야 한다. 관광객이 많은 장소니까. 본래의 의도인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널리 알리는 것’은 그런 공개적인 장소가 더 적합하다고 했었던 것이다.
내가 국회에 들어가자마자 냈던 첫 번째 법안들 중에 그런 게 있다. 당연히 일본군 위안부 소송은 국가에서 지원을 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 아닌가. 다른 나라에 가서 법원에서 소송을 걸게 되면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지원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아니다. 자비로, 아니면 관련된 단체에서 지원해 준 돈으로 진행을 하고 계셨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 특히 해외에서 일어나는 소송 등에 대해 정부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안이었고, 직접 발의했다. 그래서 3개월 만에 할머니들이 소송지원금을 받게 되셨다.
(*관련 기사 첨부: [내일신문 2012년 8월 9일자] 이자스민 의원, “위안부피해자에 소송비 지원하라”)
그리고 일본군위안부는 한국분만이 아니라 필리핀에도 많이 있다. 필리핀일본군위안부들이 한국에 올 때마다 저와 만난다. 그리고 그 할머니들을 모셔서 필리핀 유학생들과 함께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도 알리고 싶은 일이다.
그런데 그때도 그에 대한 이야기와 평가는 하나도 안 나오고 그냥 내가 반대했다는 얘기만 나왔었다.
그렇다. 얼마 전에도 필리핀일본군위안부 두 분이 오셔서 수요집회도 함께 참여를 하셨다. 필리핀에서 그렇게 연락이 올 때마다 계속 우리에게 연결을 해서 찾아오고 만나보고 한다. 나도 그럴 때마다 방문한 적도 있다. 그리고 국회에 들어오기 전에도 난 수요집회에 나갔었다. 국회를 나온 이후에도 내가 있는 단체에서 계속 나눔의 집을 찾아가고 그랬다.
나눔의 집을 갔을 때도 관계자가 따로 나에게 물어보더라. 이처럼 굉장히 많은 오해가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거기서 설명을 했다. 관계자도 당연히 그와 같은 오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얘기하더라. 많은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직접 관계자들의 그런 얘기들을 들으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학력위조와 같은 경우에는 문서 위조를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과거에 방송에서 말한 것을 가지고 위조를 했다고 하는 것이다. 필리핀은 한국과는 교육제도가 굉장히 달랐다. 지금은 그래도 한국과 많이 비슷해졌지만,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많이 달랐다. 당시는 93년도였다. 필리핀에는 의사가 되려면 과학계열 4년제를 갔다가 의대로 진학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도 의대가 없다. 그런데 내가 나온 대학교 생물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과정을 마치고 거의 대부분이 의대에 진학을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물론 의대는 아니었지만, 의사를 꿈꾸며, 재학생들은 당연한 수순으로 의대 과정으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었다. 나 역시 그런 과정으로 생물학과에서 공부를 했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서 끝까지 과정을 마무리를 못 한 것이었다. 방송에서는 한국 분들이 보기에 이해하기 쉽게 얘기하려다보니 그렇게 얘기를 하게 된 것이었다.
댓글로는 ‘그 학교에는 의대도 없는데 학력위조를 했다’고 비난 하더라. 그래서 신문 인터뷰도 이후에 이에 대해 해명을 계속 했었다. 교수님들한테 페이퍼도 받아오고, 해당 과정에 대해 설명이 되어있는 학교 홈페이지 화면 사진도 첨부하는 등 해명을 하는 것을 계속 했음에도 내 해명 기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봐 주지 않았다.
'이자스민'이 그려갈 이야기들
사실상 옛날에 냈던 목소리들마저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굉장히 많다. 오해에 대한 것, 우리가 나아가야 할 정책적인 방향도 해결하지를 못했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계속해서 정의당과 함께, 정의당원들과 함께,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 하에 해결해나가려 한다. 여태까지 추구했던 일, 해왔던 모든 것을 앞으로 조금 더 나은 대한민국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앞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그런 힘이 필요하고. 저도 그런 노력을 정의당과 함께 많이 해 나갈 예정이다.
조금이라도 대한민국을 더 열린사회로 만들었던 그런 사람. 열린사회를 향한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던, 함께 참여했던 사람. 단순히 난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아마 입당식을 했을 때도 얘기를 했을 것이다. 이제는 ‘조용히 응원하고 있겠습니다’라는 말보다 정말 같이 목소리를 내어 크게 응원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신기한 것이 하나가 있었다. 새누리당에 있었을 때는 대부분 이주여성들만 다가왔었는데, 이번에 정의당에 들어왔다고 하니 다문화 가정 아버님들이 오기 시작하신 것이다. 나에게 다가와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같이 목소리를 내고 손을 잡아줄 테니까 조금 더 많이 활동을 하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같이 노력해보자는 얘기를 하더라. 나한테는 그게 정의당에 들어오며 굉장히 신기했고 반가웠던 일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큰 목소리로 함께 해주시고 응원해주시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