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Chapter 1. "당신이 떠난 오후"

by 이양고
eyJidWNrZXQiOiJ0dW1ibGJ1Zy1pbWctYXNzZXRzIiwia2V5Ijoic3RvcnkvMmVmMjg0YzgtZWM1Zi00N2ZmLWE5NDktODc0ODYyMmYzMDM0LzgxZmQyYzI0LTkzYmMtNGJmMC04MWJlLTcwMTc1ZDk2MGQ3YS5wbmciLCJlZGl0cyI6eyJyZXNpemUiOnsid2lkdGgiOjEyNDAsIndpdGhvdXRFbmxhcmdlbWVudCI6dHJ1ZX19fQ==
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오직으로 와, 11시]


건널목에서 반대편에 있는 '오직' 카페를 멀거니 쳐다본다. 생명이 깨어나는 봄답게 날씨는 화창하고 공기 중에 떠도는 꽃가루에 코 끝이 간질간질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춥다며 목 끝까지 지퍼를 올려 입었는데 어느 새 봄에 스며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흐드러지는 봄이다.


마음이 무거운 만큼 발걸음이 무겁다. 멈추라는 듯 빨갛게 떠있는 신호에 내 마음도 동기화된 듯이 딱딱하게 굳어 신호등과 오직의 간판만 번갈아본다. 그냥 이렇게 돌아서서 집에 가버릴까. 몇 번이나 생각해봤지만 이미 너무 많이 피해왔다. 더는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안다. 늦었어, 피할 수 없어. 받아들여.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 오랜만이에요."


카페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긴다. 한때 자주 왔더니 얼굴을 트고 지낼 만큼 친해진 카페 사장님이다.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친화력이 좋지만 카페 운영에는 관심이 딱히 없는지 손님이 많지 않고 늘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들어가면서 주위를 돌아본다. 역시나, 아직 오지 않았다.


"약속, 있으신가 봐요. 아직 안 오신 것 같은데."

"아, 네…. 그러네요."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한 4개월 만인가요?"

"그렇게나 오래됐구나. 카페라떼 주세요."

"따뜻하게 드릴까요?"

"...차갑게요."


아이스 카페라떼를 시키고 익숙한 자리로 가 앉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그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속도 없이, 그저 그렇게 기다린다. 얼음컵 표면에 송글송글 맺히는 물방울들을 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죽여나간다.


"오늘따라 좀 늦으시나 봐요. 디저트 좀 드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이 건넨 쿠키를 본다. 그가 좋아하는 마시멜로우가 들어간 초코쿠키. 예전의 나라면 먹지 않고 기다렸다가 건넸을 테지만 지금은 반으로 부셔서 한 조각 입에 넣는다. 지나치게 달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긴 머리의 여자가 들어와 다른 쪽 창가에 앉는다.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화사한 얼굴. 기분 좋은 듯 잔뜩 들뜬 얼굴에, 발걸음마다 가벼움이 묻어난다. 뭐가 그렇게 좋길래, 주변 공기마저 환하게 밝히는지.


여자는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들곤 얼굴을 살펴본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에 조그마한 부스럼이 묻었다 한들 못나지 않았을 텐데, 여자는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 본다. 거울을 들여다 보던 여자가 립스틱을 덧바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친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여자에게서 시선을 뗀다.


먹고 싶지도 않은 초코쿠키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 삼키다가 문득 시계를 본다. 12시. 11시에 만나자고 해놓고 제시간에 맞춰 올 정성도 보이지 않는다. 카페라떼 속 얼음을 와작, 깨문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고, 연락을 받지 않아 속을 타들어가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와서 항상 나를 기다리던 사람, 내가 걱정하기 전에 먼저 연락해서 자초지종을 조리 있게 설명하던 사람이었다. 그도, 한 때는 그랬다. 예전엔 그랬다. 그땐… 사랑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마주하던 사람이었다.


"미안, 좀 늦었네."


전혀 미안하지도 않은 얼굴로 앞자리에 앉는 그의 얼굴이 핼쑥하다. 아마, 어쩌면 그도 정말 바빴을 지도 모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내 연락이 온지 몰랐을 것이고, 정말 정신 없이 일을 하고 있어서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었을 거고, 그런 업무에 지쳐 주말에도 얼굴을 못 보는 날이 많았을 것이다.


"커피, 안 시켜?"

"뭐하러. 곧 나갈 건데."


혼자 속으로 자꾸만 방패를 만들고 있는데, 삐딱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은 그가,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휴대폰이 꽂히는 것이, 두 달만에 마주한 얼굴이 씻지도 않은 얼굴이라는 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모자를 눌러쓴 모습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게 내가 애써 만든 방패를 산산조각 낸다. 그의 차갑게 굳은 시선이, 내게 와닿지도 않는 것을 보면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또 한번 느낀다.


긴 머리의 여자 앞에 앉은 남자가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낸다. 떼어낸 긴 머리카락을 흔들어보이며, 이런 게 붙어 있었어, 하고 말을 건네자 여자가 꺄르르 웃는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두 사람은 얼굴만 봐도 좋은 듯, 이 공간에 두 사람밖에 없다는 듯 그렇게 서로만 마주하고 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처럼 보이는 그들 옆에, 밥을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얼굴을 한 우리가 있다.


"많이 바빴나 봐."

"뭐, 그렇지."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그런가."


대화를 이어나갈 노력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란 걸까? 오랜 만에 차려입은 짧은 치마가 불편해서 자꾸 끌어내려 보지만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자꾸만 거슬린다. 어쩌면 그가 내게 맞지 않는 옷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봄이라고 화사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이, 오랜만에 꺼내 신은 구두가, 한껏 치장한 화장이, 그의 무관심 속에 처참히 부서진다. 그렇게, 마음이 녹아내린다.


"그 모자, 아직도 안 버렸네."

"아깝잖아."

"내가 사준 것도 있잖아."

"그것보다 이게 편해. 오래 써서 그런가."

"참 할 말 없게 만든다."

"무슨 말을 여기서 뭘 어떻게 해."

"그냥, 두 달 만에 만난 연인들이 나눌 법한 말들 있잖아. 잘 지냈냐는 안부. 보고싶었다는 고백… 그런 거."

"유치하게 무슨."

"너는 여기에 끌려나왔니? 누가 네 멱살 잡고 나오라고 해서 나온 거야?"

"응, 네가 불렀잖아."

"…네 멱살을 잡은 게 나였구나."

"점심 먹고 집에 들어갈거야. 프로젝트가 안 끝나서 준비할 게 좀 남았어."


귀찮은 숙제처럼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건성이다. 후 바람을 불면 날아갈 것처럼 모든 말이 가볍다. 모자를 고쳐 쓰는 그가 콧등을 긁는다. 거짓말 할 때만 나타나는 오래된 습관이다. 나와 헤어진 이후 어디를 갈 건지, 무엇을 할 건지 나는 더이상 묻지 않는다. 답이 없는 것도 대답이니까. 그의 무심함도, 내게 대답이니까.


습관처럼 옆 테이블의 여자를 본다. 여자의 시선은 온통 남자에게로, 남자의 시선은 온통 여자에게로 꽂혀있다. 한껏 정성스럽게 화장을 한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남자에게 무어라고 말을 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사랑스러운 듯 가만히 본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컵도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땀을 흘린다. 그의 앞에서 조금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내가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헤어지자는 말."


언제부턴가 내 목 끝엔 '헤어지자'는 네 글자가 매달려있었다. 기침을 하듯 그렇게 톡 털어내고 싶은 네 글자가 가시가 된 듯 목을 불편하게 긁고 있었다. 좋았던 시간들이, 행복했던 추억들이 그 가시를 털어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이라는 듯 그제서야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본다. 두 눈이 흔들린다. 카페에 들어와 내내 다른 곳을 봐놓고 이제와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이 퍽 우습다. 이미 얼음이 녹아버려 희석된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신다. 밍숭맹숭 얼음이 녹아버린 카페라떼는 이미 고유의 맛을 잃은지 오래다.


"왜 안 해?"

"뭐라고?"

"헤어지고 싶잖아, 너."

"뭔 소리야. 바쁜 거라고 했잖아."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


내가 한 말을 들은 그가 갑갑하다는 듯 모자를 벗어 머리를 쓸어넘긴다. 모자 속 머리는 얼마 전에 손질한 듯 깔끔하다. 두 달 동안 여자친구를 만날 틈도 없이 바쁘다더니 머리 손질하러 미용실 갈 시간은 있었던 모양이다. 두 달 만에 마주한 얼굴이 씻지도 않은 몰골이라는 것보다, 눌러 쓴 모자 속 머리가 단정히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아프게 만든다.


"도대체 왜… 아니 그러니까…."


3년 연애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날.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해봤지만, 내가 어떤 모습일지는 그려지지 않았다. 절대 울지만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는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짜증난다는 것처럼, 왜 이러냐는 것처럼, 이러지 말라는 것처럼, 그 한숨 한 번에 수많은 질책이 내 귓가를 스친다.


"왜 헤어지자는 말을 안 해, 왜. 평일이든 주말이든 연락도 안 되면서. 내가 만나자는 말이 귀찮으면서, 내 존재가 너한테는 숙제면서, 왜… 왜 안 해."

"그만 울어. 보기 싫어."

"그래, 헤어지자. 이 네 글자를 못 뱉어서 등신 같이 두 달을 기다렸어. 카톡으로 통보해도 문제 없을 네 글자를, 뱉으려고 기다렸어."


눈물이 흘러나와서 자꾸 숨이 막히는 내 얼굴이 더 숨이 막힌다는 표정을 한 그를 뒤로 하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켜 카페를 나선다. 두 손을 꼬옥 맞잡은 채로, 여전히 서로에게 시선을 붙인 채로.


'재진아, 우리 이번 주말에는 어디 갈까?'

'율이 네가 가고 싶었다던 루프탑 갈까?'

'너무 좋아!'

'나는 율이 네가 너무 좋아.'

'왜 그렇게 봐?'

'그냥, 이 순간들이 곧 깨어날 꿈 같아서.'

'네가 아무리 꿈에서 깨어나도 모든 순간 네 옆을 지키고 있을게.'

'치, 말은 잘해.'

'말뿐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지.'

'그냥 동료라고 몇 번이나 말해.'

'그냥 동료인데 손은 왜 잡고 있었냐고!'

'취해서 넘어질까 봐 잡아준 거라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


긴 머리의 율과 화사한 얼굴의 재진이 그렇게 오직에게서 멀어진다. 두 사람의 앞에 펼쳐질 나날들을 모른 채 멀어진다. 인생에 단 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두 사람이 언젠가 서로를 미워하게 될 날이 온다는 것조차 모르고 그렇게 멀어진다. 나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화장을 고치며 재진을 기다리던 나날들을, 모든 꿈에서 깨어나도 끝까지 옆자리를 지키겠다던 그를, 맞잡은 두 손이 참 따스했던 시간들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엉엉 운다. 그렇게 오직 한 사람이었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운다.





ChatGPT Image 2025년 12월 24일 오후 12_18_33.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