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 통화

Chapter 1. "당신이 떠난 오후"

by 이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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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신경질적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벌써 열 다섯 통째 받지 않는 전화를 계속 걸고 있다. 그 말은 곧, 그가 열 다섯 통째 내 전화를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넘겼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차라리 마른 세수를 한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약속했잖아.]


받지 않는 전화에다 대고 남기는 문자가 무슨 소용 있겠나 싶어 남길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메시지를 발송한다.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1이 쉽게 사라진다. 그 순간 실낱 같은 희망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몇 시간째 내 마음을 애태웠던 감정이 금세, 희석된다. 집에 오고 있다고 말해. 내가 걱정한 그런 일은 없다고 말해. 여전히 나만 사랑한다고 말해. 너의 진심이 변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다시 내게 말을 해…. 제발.


[먼저 자, 전화하지 말고.]


실낱 같은 희망이 피어올랐다가 금방 꺼져버리고 서운한 마음만 다시금 증폭된다. 겉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서운함이 곧 가시가 되어 아무렇게나 사랑을, 마음을, 추억을, 기분을 할퀸다.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상처는 미워하는 사람이 주는 상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깊고, 쓰라리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의미 없이 방을 서성인다. 열 다섯 번의 의미 없는 발신음을 들어야만 했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의 휴대폰에는 내 이름이 계속해서 반짝거렸을 것이다. 휴대폰 속에서 처량한 내 이름 세 글자가 뜨는 것을 보면서도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그렇게 간단하고 쉽게 나를 무시했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걸려온 전화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수화기 너머 두 눈이 벌게진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무시하는 일이었다. 그의 손쉬운 무시 속에서 갈증을 느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바싹 말라갈 뿐이었다.


한 모금의 물이라도, 장난 같은 사랑이라도 믿을 수 있을 텐데, 고작 그 정도의 표현도 내게 와닿지 않는다. 내가 고작 한 모금의 물에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 줌 재보다 가벼운 사랑의 표현마저 목숨을 걸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내게 모래 한 알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아프게 나를 찌른다.


침대에 엎드려 아무런 죄 없는 휴대폰만 노려본다. 한 통의 전화라도 잠깐 받아서 거짓된 상황이라도 친절히 설명해준다면 나는 괜찮을 텐데. 난 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너를 한 번 더 믿어볼 텐데. 그는 이제 가타 부타 핑계를 댈 필요도 없다는 듯 나를 대하고 있다.


'사랑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더 사랑해'


그동안 함께 나눈 메시지를 훑어보다가 결국 소리 내어 엉엉 운다. 내게 닿지 않는 그가 미워서 운다. 이러지 않기로 약속하고 결국 또 똑같은 상처를 건네는 그가 미워서, 운다. 처음부터 나를 이렇게 대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이토록 질질 끌려 다니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분명히 함께라서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고,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있었고,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서 두려울 것이 없던 시간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그를 믿었고, 그가 보여준 표정들을 믿었고, 사랑한다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사랑의 말이 이젠 의미 없는 말들이 되어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난다. 그를 기다리는 내 마음이 산산조각 나 너덜너덜해졌듯이.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햇빛은 방 안으로 스며드는데, 나는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은 채 그의 얼굴만, 우리의 추억만, 같이 나눈 사랑의 대화만 되뇌고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원인을 고민하며.


그가 나 하나로는 만족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꽤 오래된 일이었다. 앞에서는 사랑을 열렬히 표현하던 그가 뒤에선 사실, 내게도 했던 지겨운 사랑의 표현들을 다른 이성에게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누군가 세게 뒤통수를 내려찍는 것 같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낸 그 날 새벽에도 그는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 없인 안 돼, 너만 사랑해'


이제 더 잠들 생각도 없이 몸을 일으켜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는다. 몸이 물을 머금은 솜마냥 무겁다. 바닥으로, 끝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하여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단 한 번이라도 손을 내밀어 나를 이끌어주면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치 바다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떠나고 없는 빈자리가 내게는 커다란 바다 같이 느껴져서, 끝이 보이지도 않는 저 깊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숨이 막혀 죽는 건 아닐까.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찰박찰박, 발 밑에서 물소리를 얼핏 들으며 몸을 일으킨다. 넘어질 것 같아 벽을 짚고 주변을 돌아본다. 돌고 돌아 여기다. 결국, 현실이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다가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향해 물 한 모금을 겨우 삼킨다. 울어서 말라붙은 목구멍에 겨우 숨통이 트인다.


이별은 이별이고, 일상은 일상이다. 그가 내게 상처를 줬다고 해서 나는 정말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나는 또 내 일상을 씩씩하게 살아내야 했다. 어른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상처를 숨긴 채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 있는 것, 혼자서 몇 시간 동안 울었다 해도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적이 없는 것처럼 웃는 것. 어렸을 땐 뭐든지 척척 해내는 것만 같은 어른이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막상 그 나이가 되어 보니 그저 속내를 잘 숨긴 채 아무렇지 않은 듯 가면을 잘 쓰는 것이 좋은 어른이었다.


[미안. 어제 너무 취해서 잠드는지도 모르고 잠이 들었어.]


출근을 하고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보는데 메시지가 도착한다. 지긋지긋한 변명. 반복되는 잘못 속 바뀔 것 없는 레파토리. 그는 내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나는 잘못을 저지르는 그를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부여한 역할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그는 자꾸 내게 잘못을 저질렀고, 나는 그의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에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어 괜찮다는 말을 건넨다.


[속은, 괜찮아?]


멍청이. 헤어지자는 말 네 글자를 뱉지 못해 또 속으로 삼키는 바보. 다른 사람 앞에서 똑부러진 척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다. 나는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문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곁에 선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의 옆에 선 나는 그를 애틋해하면서도 스스로는 망가져갔다.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잇장보다 가벼운 사과의 말로 무마한 채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그를 미워하기보다 나를 미워하기를 선택한 건 누구의 강요도 아닌 바로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응 괜찮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 어제 너무 취해서 실수할까 봐 전화를 받지 못했어.]


거짓말.


[괜찮아. 집에 무사히 들어갔다니 다행이다. 나도 바로 잠들었어.]


이 또한 거짓말.


[이번 주말에 어디 갈까? 가고 싶었다던 거기 가볼까? 얼른 보고 싶다.]


거짓말.


[응, 거기 같이 가고 싶었어. 나도 너무 보고 싶다.]


거짓말… 이고 싶은 진심.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무렇게나 머리를 쓸어넘긴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의 반복되는 거짓말 속에서 나 역시 그를 따라 거짓말을 하고 있다. 처음엔 괜찮은 척으로 시작했던 거짓말이 어느새 우리 사이의 근간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거짓말 없이는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다. 괜찮지 않은 상황들이 모이고 모여, 고이고 고여, 괜찮은 척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산산조각이 날까 두렵다.


그와 함께였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구태여 설명할 가치도 없는 지난한 과정들이 반복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내게 거짓말을 했고, 다른 이성을 만나기 위해 밤길을 나섰고, 그럴 때면 내가 반복해서 거는 몇 번의 전화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이면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왔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악의 굴레였다.


"왜, 안 헤어져요?"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선인장도 물을 오랫동안 먹지 않으면 바싹 말라버린다. 언젠가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겨우 서 있던 선인장도 너무 오래 갈증이 나면 그렇게 증발해버린다. 그를 기다리기만 한 내가 결국 바싹 말라버렸듯이.


"그러게요."


남자가 내게 그런 말을 건냈을 때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나도 알 수 없었다. 왜 헤어질 수 없는지. 그가 반복되는 잘못을 저지르는 동안 나는 사람들을 잃었고, 시간을 잃었고, 가족을 잃었고, 눈물을 흘렸고, 나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를 놓을 수가 없다. 자기파괴적인 사람이라 나 없인 힘들 것 같아서, 불쌍한 사람이라 결핍을 채워주고 싶어서, 내가 많이 사랑해서… 일련의 핑계가 있었지만 그저 나는 용서하는 포지션을 오래도록 놓지 못한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무슨 뜻이에요?"

"무서워서 못 헤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허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동정도, 연민도 아닌 다른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시선으로 들어왔다.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내가 퍽 낯설었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쉽게 읽기 힘들어서 차라리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의 진심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맞아요, 좋아하는 거."


그의 반복된 거짓말 앞에서 주저앉아 울 때마다 내 옆을 지켰던 남자.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엉엉 우는 날 멀거니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에 담기는 감정이 애정이었나. 호감이었나. 동정이나 연민의 텁텁한 감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산뜻한 감정이었나.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머리를 굴리는데 휴대폰에 문자가 한 통 도착한다.


[내일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못 갈 것 같아, 미안해]


지긋지긋한 그의 거짓말. 사실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밥을 먹었다고 해도, 퇴근을 했다고 해도,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해도 다 거짓말 같이 느껴져 나는 매번 불안함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이러다가 심장이 망가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귓가에 심장박동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나를 좋아한다면, 적어도 내 마음을 고려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지금은 시기상조네요."


남자친구 있는 내게 고백을 하는 그가 실은 싫지 않았다. 나는 자꾸 기다리기만 하고, 잘못한 채 용서를 비는 것을 용서해야만 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 다 퍼주기만 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그런 날 좋아한다고 하니까. 날 좋아하는 누군가는 이런 나라도 기다릴 것이고, 그럼 주기만 하던 내가 받기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상처 받으면서도 그를 놓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사람 때문에 우는 당신을 보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요. 말 안 하면 영영 울기만 할까 봐."


그를 놓을 수 없었던 내 마음처럼 엉엉 우는 나를 앞에 두고도 괜찮냐는 말밖에 하지 못했던 그의 마음에서 어쩔 수 없는 감정이 터져나와버린 걸까. 퍽 단호한 그의 말에 그저 쓰디쓴 커피를 홀짝거리기만 한다.


"받아달라고 한 말 아니에요. 부담 갖지 마세요."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다며 남자가 먼저 자리를 뜬다. 휴대폰 화면 속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반복하는 그의 메시지와 부담 갖지 말라며, 필요할 땐 휴지처럼 아무렇게나 갖다 쓰라는 남자의 말 사이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유영하며 떠돌기만 한다.


사람의 마음이, 진심이, 선택이 마음 먹은 대로 움직이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 마음은 말 그대로 제멋대로여서 내 마음인데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방향도 모르고 깊이도 모른 채 커지기만 하다가 어느 날 풍선처럼 팍 터져버릴 뿐이다. 나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삼켰다. 이대로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만 싶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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