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당신이 떠난 오후"
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눈이 번쩍 뜨인다. 주변을 급하게 돌아보고서야 꿈인 것을 안다. 꿈에서 깨기 직전 변치 말자, 라고 했던가 영원하자 라고 했던가. 정확한 말이 떠오르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꿈 속에 나왔다는 사실이었고, 그건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지독한 향신료 한 알을 그대로 씹어먹은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 보다가 문득 시선에 걸리는 게 있다. 그와 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담긴 커다란 액자. 그가 나로부터 떠나갔을 때 아무렇게나 바닥에 처박아 둔 것이 벌써 6개월 전이다. 지독하다면 지독한 게으름이다. 저 액자 말고도… 싶어 방 안을 둘러본다. 눈에 보이지 않게 아무렇게나 처박아뒀다지만 분명히 곳곳에 보이는 그의 흔적들이 있다.
처음엔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는 내게 자주 미안해했다. 처음엔 더 잘해주지 못해서,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건 내게 로맨틱한 고백과도 같아서 그가 하는 말을 믿고 싶어졌다. 그가 미안하다며 내게 내뱉은 사과는 겉만 번지르르하게 꿀이 잔뜩 발린 속은 썩어버린 사과라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생각났다…. 미안하단 말이었어."
청소를 하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문득 꿈에서 그가 내게 뱉은 마지막 말을 떠올려낸다. 목구멍을 긁던 가시가 톡 나온 것 같은 개운함이 순간 몰려왔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나는 또다시 그의 생각에 콧등이 간지럽다. 오래된 습관처럼.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창문을 연다. 이번에 머리를 잘라버릴까 생각하며 얼굴 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단정하게 만든다.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코 끝을 간지럽게 만드는 가을 향기가 느껴진다.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맥주캔을 집어든다. 그와의 관계가 마무리 된 이후 나는 술 없인 잠들지 못했다. 벌써 네 달이 넘도록 깊은 잠에 들지 못해 머리를 갖다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가도 그가 꿈으로 찾아오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불면증이었다.
불면증의 시작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자주 싸웠고, 새벽마다 고성이 오갔고, 그럴 때면 유리병이 깨지는 건 으레 루틴 같은 일이었다. 싸우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싹싹 빌며 구하는 용서가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더는 부모님 싸움 앞에서 울지 않았다. 그저 깨진 유리병을 치우고 망가진 tv가 빛나지 않도록 전원을 뽑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엉엉 우는 엄마를 달랠 뿐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나의 지독한 불면증은. 부모님은 가끔 가다 사이가 좋았고, 아주 자주 싸웠다. 나는 아주 가끔 부모님이 사이가 좋을 때도 새벽 3시마다 깼다. 금방이라도 부모님이 던진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그건 고질적인 병과도 같아서 지긋지긋한 싸움을 보기 싫어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자주 깼다. 새벽마다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서로를 밀치며 아무렇게나 내뱉는 욕설이 들렸다. 들리지도 않은 비명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면 아무 일도 없이 고요한 내 방이 어느 날엔 오히려 너무 무심하게 느껴져 사무치게 외로웠다. 모순이었다.
'또 깼어?'
어느 날엔가 차마 버리지 못한 습관을 또 저지른 사람처럼, 무언가에 쫓기듯 잠에서 깨어났고, 그때 밤 늦게 깨어있던 그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누군가 내 곁을 지켜주는 것이, 아무 일도 없으니 괜찮다며 나를 토닥여주는 것이 좋아서 나는 오래도록 그를 잊지 못하였나 보다.
그러고 보면 그 역시 불면증이 심했다. 자주 잠에서 깨어났다. 나처럼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라 잔뜩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가도 벌떡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을 꿨어? 물으면 그저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안정감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서 나는 그저 품 안으로 파고 드는 그를 두 손으로 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우리는… 아니, 그와 나는 결핍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핍이 있다는 건 종잇장 같이 얇으면서도 견고한 성 같아서, 결핍이라는 공통점만으로도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고 쉽게 불타올랐고, 민들레 홀씨와 같이 가벼운 약속을 했다. 영원하자는, 변치 말자는, 함께하자는, 그런 일련의 약속들이었다.
나의 결핍을 그가 채워주었듯이, 나 역시 그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좀 더 잘하면, 내가 더 다정하게 안아주면, 더 아껴주면, 예뻐해주면, 사랑해주면…. 지금에서야 안다.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소는 아무리 발을 동동 거려도 위 아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안다. 내가 한 모든 최선은 그의 결핍을 증폭시켰다는 것도, 지금의 나는 안다.
먼지를 털어낸다. 아무렇게나 걸어둔 옷가지를 꺼내 세탁기에 넣고 옷걸이에 반듯하게 건다. 마음이 힘들 때면 아무렇게나 꺼내 읽었던 책을 크기별로 책장에 꽂는다. 쓰레기를 버리고, 얼룩들을 지워낸다. 힘 주어 박박, 닦아낸다. 오래된 얼룩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고 그저 조금씩 흐려지기만 할 뿐이다.
아무렇게나 처박아두었던 액자를 꺼내 먼지를 닦았다. 뭐가 그토록 좋은지 서로를 마주 보며 가장 행복한 듯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이 그곳에 있다. 이곳에는 없는, 두 사람이 그곳에는 있다. 코 끝이 찡했다가 이내 괜찮아진다. 내가 싫어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은 사람이야. 언제까지고 계속 슬퍼할 필요 없다는 뜻이야. 나는 씩씩하게 나를 달랜다.
구석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그의 흔적들을 꺼낸다. 차마 들여다 볼 자신이 없어서, 들여다 보기만 하면 마음이 저려와서, 함께했던 추억들이 심장을 콕콕 찔러대서 볼 수 없었던 추억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먼지를 닦아낸다. 반지, 옷, 신발부터 시작해서 말로는 차마 다 표현할 수 없어 꾹꾹 눌러 쓴 손편지, 서로를 마주 보며 함께 찍은 사진, 함께 만들었던 그릇…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의 흔적은 쓰레기 봉투가 가득 담길 정도로 많다.
씩씩하게 쓰레기 봉투에 담은 다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싹싹하게 집 밖에 내놓는다. 이로써 끝이다. 정말, 끝이다. 이제 혼자서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거야, 씩씩하게 다짐하며 오랜만에 맛있는 것을 시켜먹을 거라며 신나게 집으로 들어섰다가 낡은 신발 하나를 발견한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은 위험하대서. 신발이라도 두면 좀 낫대서…. 낡아서 좀 미안한데 새 신발은 또 안 믿는대서…'
자주 신어서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발이 편해 자주 신는다던 그 신발을 현관 한 켠에 두며 중얼중얼 거리던 그 얼굴. 크지 않은 눈이 반달 같이 휘어지던 그 순간이,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던 그 손가락과 나를 단단하게 안던 팔이 차례대로 떠오르자 그에게서 항상 맡을 수 있었던 은은한 샴푸향이 코 끝에 확 끼친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다정했던 너는 이제 정말 내 과거에만 있는 거구나.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자 파도 앞 모래성이 한 순간에 망가져버리는 것처럼 무너진다. 견고한 적 없었던 것처럼 한 번에 확 무너져버린다.
한참을 울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남아있던 얼룩이, 퉁퉁 부은 두 눈으로 들어온다. 한번 스며든 얼룩은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남아있는다. 내게 그가 하나의 얼룩처럼 남게 되었듯이. 퉁퉁 부은 눈을 꾹꾹 눌러 흘렀던 눈물을 다 지운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렇게 한 동안은 남아 있겠지만,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란 걸 생각하며, 다짐하며, 그렇게, 지워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