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당신이 떠난 오후" 중에서
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버스에 앉아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마침내 차창 밖으로 반짝거리는 물결이 보였다. 굽은 산길을 지나 달려온 지 한참 만에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 물결을 마주한 것이다.
"바다네."
한숨 같은 탄식을 작게 내뱉은 것도 잠시, 아주 짧은 틈 사이로 머릿속에 한 사람이 지나갔다. 지긋지긋한 그 얼굴이었다. 얼른 고개를 젓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다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데 한 번 떠오른 얼굴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 것처럼 머릿속에 두둥실 떠올랐다. 차라리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만, 이제, 제발, 그만.
"종점입니다. 내리세요!"
한 번 떠오른 얼굴을 지워보고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다. 버스 기사의 외침에 헐레벌떡 짐가방을 챙겨 들고 버스에서 쫓기듯 내리자 코끝으로 바다 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묘하게 봄바람이 섞인 바다 비린내. 살갗으로 닿는 봄바람이, 코끝으로 스며드는 바다 비린내가 나쁘지 않아서 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무작정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다를 보면 뭐가 달라지냐는 친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를 타고 떠날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떠나온 이유도 그저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날 찾는 이도 없는 그런 한적한 바닷가 동네에서 아무 생각 없이 열흘간 쉬고 싶다는 게 바람이었다. 어디로 갈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바다를 보며 시간을 죽이고 싶었다. 온갖 일상에 치인 나를, 머리를, 마음을, 시간을 쉬게 하고 싶었다.
"가장 가까운 바다로 가주세요."
"예?"
"여기서 제일 가까운 바다요. 바다면 돼요."
작은 가방 하나 둘러멘 여자의 말에 택시 기사는 이상함을 느꼈는지 백미러로 흘깃 내 얼굴을 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길을 찾고 검색하고 가장 가까운 거리가 어딘지 계산하고, 이것저것 따지고 재는 것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저 가만히,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몇 시간쯤 보내고만 싶었다.
택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에 멈춰섰고, 택시 기사는 내가 내민 카드와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혹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인상착의를 설명할 것처럼 뚫어지게, 집요하게 쳐다보는 눈길이었다. '저 죽으러 온 거 아니에요,'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구차하고 지긋지긋해서 입을 다물었다. 날 보는 시선 또한 상관없잖아, 떠나면 그뿐인걸. 여긴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니까.
택시에서 내려 문을 닫고 고개를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넓게 펼쳐진 것이 보였다. 강하지 않은 봄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래, 내 눈앞에 바다가 있잖아. 그거면 됐어. 차갑지 않은 포근한 봄바람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그렇게 서 있었다. 시간이 마구 흘러가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 서서 눈이 멀어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바다를 본 지 1분이나 지났을까? 낭만적이게 그저 바다를 보며 시간을 죽여가고 싶었는데 배가 고파왔다. 이런 순간엔 알아서 허기짐도 지나가면 좋겠건만 나는 그저 살아 숨 쉬는 인간에 불과해서, 밥때를 놓친 뱃속이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제 내게 주어진 건 자유뿐이야. 서두르지 말고 찬찬히 바다를 즐겨야지,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더니 바닷가답게 온통 횟집뿐이었다.
왜 하필... 회야. 옷가지가 들어있는 가방을 고쳐 메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식당이라곤 하나같이 매운탕을 곁들인 회를 파는 곳뿐이었다. 날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즐겨 먹지도 않았지만 이번 참에 도전해볼까 싶어서 입구에 서보았다. 들어갈까 말까, 많이 비리진 않을까 호기심 어린 눈길로 식당 내부에 붙은 메뉴판을 눈으로 훑는데, 출입구 옆에 자리 잡은 작은 수족관이 눈에 들어왔다. 맑은 물을 유유히 헤엄치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너무 생생해 보여서, 먹을거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저 살아있는 생물같이 느껴졌다. 적당히 깨끗한 물속에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그저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모습이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했다.
멍하니 물고기를 보는데 그들에게는 나의 시선이 그저 포식자의 시선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주 넓은 바다를 헤엄치다가 작은 수족관에 갇힌 것도 억울할 텐데, 죽을 시간만 기다리며 저 작은 곳을 하염없이 헤엄만 치다가 알지도 못하는 인간 하나가 와서 지목하면 목이 날아가고 온 몸에 피가 빠지고, 내장을 제거한다니. 그저 먹을거리에 불과하다지만 괜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두 눈알과 마주치자 아찔해졌다.
"미안해, 뭐든."
나는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사과를 섣불리 건네며 도망치듯 횟집 거리를 빠져나왔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벌써 18시간 넘게 공복이었다. 야근을 하든, 근무를 하든 친구나 가족을 만나든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에 지속되는 공복에 뱃속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뭐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만 더 돌아보고 정말 먹을거리가 없으면 택시라도 잡아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헐레벌떡 들어가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샀다. 편의점이 이토록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이런 곳에도 편의점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컵라면과 삼각김밥, 바나나 우유를 골라 매대에 올려놓곤 창밖을 보았다. 여기서도 바다가 보이려나 싶은 생각에 까치발을 들었는데 건물 사이로 빼꼼 작은 모양이지만 바다가 보였다. 다행이다, 바다를 보면서 먹을 수 있어서.
"5,900원입니다. 젓가락 필요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바다는 저쪽에 앉으면 더 잘 보여요."
"네?"
"바다 보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서. 저기가 좀 더 잘 보여요."
계산을 하려고 카드를 내미는데 또래로 보이는 종업원이 무신경하게 어딘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내가 쳐다보고 있던 곳과는 반대쪽이었지만 간이 테이블과 의자도 마련되어 있는 곳이었다. 내 속마음을 간파당한 것 같아서 퍽 부끄러워져서 "네, 네...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컵라면에 물을 받고 익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호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휴대폰이 켜져있으면 그게 누구든 연락을 하고 싶을 것 같아서,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봐달라고 알릴 것 같아서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 껐지만 일상 같은 공백이 찾아오자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이 근질거렸다. 잠깐만 켰다가 바로 끌까? 싶은 마음이 들어 휴대폰을 계속 만지작거렸지만 이내 관뒀다. 연락이 와 있어도, 아무 연락이 없어도 실망스럽고 번거로울 것 같았다. 연락이 와있다면 다시 끄지 못하고 뭐라고 연락해야 할까 싶은 마음이 들어 내내 휴대폰만 보고 있을 테고, 그 누구에게도 연락이 없다면 괜히 공허한 마음에 SNS를 뒤지게 될 것만 같았다. 어느 쪽이든 성가시고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우리가 헤어질 수 있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만하고 싶다는 뜻이야.'
'넌 그런 이야기를 왜, 이런 데서 해.'
'날씨가 너무 좋아서, 눈이 부셔서.'
'뭐?'
'이런 곳에 너와 있는데도 전혀 행복하지가 않아서.'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을 하고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맥락에도 없는 말을 툭툭 던져놓는 사람이었다. 앞뒤를 끊어먹은 그 말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건 항상 나였다. 그가 내뱉은 말은 어느 날엔가 불쑥불쑥 떠올라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내 일부가 되었다. 그의 숨은 속뜻을 알아차리는 게 일부가 될 만큼 오랜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가 아무렇게나 툭툭 뱉은 말들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눈이 부시게 맑은 날 헤어짐을 고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디서 왔어요?"
허기짐에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국물마저 싹싹 먹고 멍하니 허공을 보는 순간에 찾아온 그와의 추억에 나는 속절없이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 떠났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잊고자 여기에 왔고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아주 짧은 공백만 생겨도 그는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헤어지기 전 그와 나눈 대화를 무심히 돌아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헤어짐을 고하는 그 순간에도 그가 너무 '그'다워서, '그'스럽게 이별을 고했던 상황이 우스웠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을 배려하기는커녕 고작 제가 잘나 보이는 게 최우선이라는 게 이제 와서 같잖고 우스웠다. 남자다운 면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던 녀석이 끝까지 잘난 척을 했다는 게 아니꼬웠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를 떠올리는 나 역시 우습긴 매한가지였다.
"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며 웃고 있는데 편의점 조끼를 입은 종업원이 맞은편에 앉더니 담배를 꺼내 물며 무심하게 물었다. 갑작스럽게 말을 거는 게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주변을 살폈지만 근처에 있는 거라곤 종업원과 나, 그늘에 앉아 그루밍을 하고 있는 고양이뿐이었다.
"여행 왔어요?"
"네.... 왜요?"
"그냥요. 너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이라. 심심해서요."
담배에 불을 붙인 종업원이 연기를 깊게 머금곤 후- 하고 내뱉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 내가 앉은 곳 반대편이라 연기가 저만치 멀어지는 게 보였다. 담배 연기가 허공에서 부서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이라는 말이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이런 권태로움을 느꼈던 걸까? 이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지루함이 섞인 그 권태로움.
"왜, 왜... 왜 울어요?"
"너무 평범한 날이라서요."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들이 눈부시게 좋았다는 것을. 그가 권태롭게 느낀 그 순간순간들이 내게는 행복한 날들이었다는 것 또한 마음 깊이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멀리 와야만 했던 건, 5년을 함께한 그의 갑작스러운 이별에 바보같이 순응하고 힘들어하는 내가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는 걸.
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 앞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봄바람이 따스해서, 바닷바람이 비릿해서, 너무 평범한 날이라서,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날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