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할게

Chapter 2. "첫사랑의 온도" 중에서

by 이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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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전화할게."


그의 한 마디에 온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밥을 먹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모든 걸 멈추고 울리지 않은 벨소리를 듣곤 감감무소식인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혹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벨소리를 최대한 높여놨지만 휴대폰은 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친 척하고 내가 먼저 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바쁜 일 끝나고 전화할게"라는 그의 말 한 마디가 마치 마법 같아 한 통의 전화도 걸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바쁜 거면 어떡해. 내가 그 바쁜 일을 못 끝내게 방해하는 거면? 고작 몇 시간을 못 참는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내 전화 한 통이 그에게 대단히 방해가 되지 않으리란 걸 알지만, 그가 그다지 바쁘지 않으리란 것 또한 알지만 나는 고분고분히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하겠다는 그의 말 한 마디가 그저 간단한 인사치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 나흘이 지났다. 바쁜 일 끝나면 전화를 하겠다던 그의 전화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처음엔 일이 끝나지 않았겠지 생각했다. 아직도 바쁜 거겠지 생각했고, 그다음엔 마무리를 하는 중일 거야, 정리를 하는 중일 거야 온갖 생각으로 나의 마음을 달랬다. 나중엔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게 지긋지긋해서 무음으로 바꿔둔 휴대폰을 이불 깊숙이 숨겨두기도 했지만 곧 진동이 울리는 착각이 들어 헐레벌떡 휴대폰을 꺼내는 일을 반복했다. 바보 같았다.


그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혹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봐 일주일 동안 술 한 모금 먹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기다린 그 전화 한 통을 잠깐의 실수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이나 지나고 나니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기다려도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으리란 걸. 그래, 이제 더는 모른 척할 수 없다. 그는 바쁜 일이 끝나고 다시는 바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 해도 내게 전화를 걸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 끈기는 길었고, 포기는 쉽지 않아서 그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더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단단한 결심을 한 나는 휴대폰을 꺼버리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깊은 잠에 들어버리리라 생각하며.


나의 작은 집 한켠에 놓인 냉장고엔 온갖 술이 들어있었다.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건 역시 캔맥주였다. 국내 기업의 맥주부터 다양한 나라에서 만들어진 외국 맥주도 색색이 알록달록하게 냉장고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많은 건 향과 맛과 도수가 각양각색인 양주였다. 어떤 건 선물로 받은 것이었고, 또 어떤 건 집들이 선물로 받은 것이었으며 또 어떤 건 아빠가 선물로 받았는데 맛이 없다며 우리 집에 가져다 놓은 술이었다.


나는 대체로 맥주를 가장 즐겼지만 특별히 기분 좋은 날이나,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싶을 땐 양주를 마시는 편이었다. 시원한 얼음을 잔뜩 넣어 만들어 먹는 하이볼은 주로 많은 사람들과 기분 좋게 취하고 싶을 때였고, 부모님이 집에 방문했을 땐 주로 커다란 얼음을 넣어 조금씩 희석해 먹는 온더락 방식을 선택했다. 양주는 먹는 방식에 따라 취하는 시간도, 즐기는 맛도, 선택하는 안주도 달라져 먹는 재미가 쏠쏠했으나 혼자 마실 땐 맥주만 한 게 없었다.


맥주는 간단한 안주에 혼자 술잔을 기울여도 적적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술이었다. 다른 술과는 다르게 도수가 높지 않고 탄산이 강해 안주를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치킨에서부터 샐러드, 가벼운 스낵류에도 가볍게 곁들일 수 있어 좋았다. 냉장고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만큼 내가 좋아한다는 뜻이었고, 그 말은 곧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이 제일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화한다는 말을 하지 말지."

시원한 캔맥주를 꺼내 따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치익- 하고 시원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전화한다는 말 따위 하지 않았더라면 오랜 시간 기다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왜 그런 소리를 해서 사람 기다리게 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마음 한켠에선 그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느껴져 입안이 텁텁했다. 차라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텁텁한 마음으로 청량한 맥주가 들어가자 개운함이 몰려왔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내내 글이 써지지 않았다. 글에만 집중해도 심도 깊은 글을 완성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그를 기다리는 일이 마음속에 더욱 커지자 글 한 줄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감일이 당장 다음 주라 노트북을 펼쳐놓고 그동안 써놨던 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군데군데 깨어진 조각처럼 집중력이 흩어진 부분이 명백하게 보였다. 그를 기다리는 행위가 내 일상 여기저기에 퍼져 나를 좀 먹고 있었다는 게 퍽 속상했다.


그까짓 게 뭐라고, 감정이 뭐라고, 첫사랑이... 뭐라고 일을 망치는 거지. 도무지 글 쓸 마음이 들지 않아 다시 노트북을 닫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마음이 너덜너덜 찢어져 있었다. 그를 기다리면서도 그에게 연락 한 통 할 수 없는 내가 가여워 마음이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모든 많은 행동을 참고 삼켜내서 마음이 잔뜩 찢어져 있었다. 도무지 취할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집에 있는 것들로 대충 안주를 차려놓고 커다란 TV 앞에 앉아 유행이 지난 코미디 프로그램을 멍하니 본다. 10년도 더 지난 오래된 예능 프로그램들이었다. TV 속 연예인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꺄르르 웃음이 퍼지는데 그 모든 상황을 관망하는 나는 전혀 웃음이 터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속으로 지금 보니 다들 어렸구나 싶은 생각에, 저 프로그램을 보던 어린아이였던 내가 사회에 찌든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시간의 야속함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와하하-" 즐겁다는 듯 산뜻한 방청객의 웃음이 귓가에서 웅웅거린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전화를 안 받으니까! 전화는 뭐하러 꺼놨어?"

"아, 기다리는 전화가 있어서."

"뭐?"

"기다리기 싫어서."

"뭐라는 거야. 술 먹고 있었어?"


초인종이 울리자 습관처럼 벽걸이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23시가 좀 넘은 야심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누가, 여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터폰을 열어보았더니 낯익은 얼굴 하나가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현관문 너머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옆 동네에 사는 친구 희수였다.


"야, 팀장이 너 글 언제 나오냐고 재촉하는데 언제 완성돼? 이번 주 안에 완성되긴 하는 거지?"

"왜 이렇게 재촉해? 다음 주가 마감이잖아."

"초안 보여 달래도 안 보여주고 전화는 꺼져있고! 내가 걱정이 돼, 안 돼?"


희수는 성큼성큼 집 안에 들어서더니 탁자에 꺼내놓은 맥주 하나를 따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뻔뻔한 낯짝." 하고 중얼거렸더니 "능구렁이 자식." 하고 되받아쳤다. 어깨를 으쓱하고 냉장고에서 맥주 몇 캔을 더 꺼내와 탁자에 올려두자 희수는 휴대폰으로 배달 어플을 뒤적거리며 "치킨 먹을래?" 하고 물어왔다. 치킨이라는 말에 시장감이 마구 몰려왔다. 끼니다운 끼니를 해결한 게 언제였더라? 탁자에 놓인 식빵 쪼가리만 고작 삼키다가 누군가 함께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고 생각하니 허기가 증폭되어 꼬르륵,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국은 배달의 민족답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따뜻한 치킨이 배달되었고, 야근을 막 끝내고 퇴근했다던 희수와 나란히 앉아 닭다리를 잡아 뜯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홀로 있을 땐 그토록 공허하더니 누군가와 함께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따뜻했다. 희수는 양념 묻은 손을 물티슈로 대충 닦곤 맥주를 들이키며 무심한 말투로 말을 던졌다.


"그냥 연락해보지 그래?"

"싫어. 자존심 상해."

"상할 자존심이 남아 있기는 하냐?"

"내가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야."

"아주 걸레짝이 된 마음으로 여기까지 짝사랑 끌고 온 게 대단하기도 하지."

"자꾸 그럴래?"

"그러니까 뭐하러 자꾸 피하냐고. 그냥 제대로 차여버리면 되잖아."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맥주를 들이키는 희수의 네 번째 손가락에 결혼 반지가 얄밉게 반짝거렸다. 올해 초에 1년 남짓 연애한 사람과 결혼에 골인한 희수는 최근 꿀 떨어지는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결혼한 유부녀가 뭘 알아?"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데 때마침 탁자에 올려둔 희수의 휴대폰이 빛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희수는 부끄럽다는 듯 휴대폰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베란다로 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염장 지르러 온 거야, 뭐야. 나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희수의 환한 웃음을 시샘하며 소파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혼자였으면 어찌저찌 버텨볼 수 있었을 텐데 사랑에 젖어 환한 절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부아가 막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깟 놈 때문에 죄 없는 휴대폰을 꺼놓는 게 말이 안 되지. 나는 온갖 합리화를 줄줄 늘어놓으며 차갑게 꺼져있던 휴대폰을 켰다. 1분도 지나지 않아 켜지는 휴대폰을 저만치 밀어두고 리모콘을 들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최대로 올려놓은 벨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의 전화였다.


"뭐해? 안 받아?"

"받아서 뭐라고 해?"

"뭐든 해! 우선 받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휴대폰을 집어 들고 눈치를 살피는데, 그 사이 통화가 끝난 희수가 들어오더니 얼른 받으라며 재촉했다. "바로 받으면 기다렸던 거 티나잖아, 안 받고 싶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틈을 타 통화 버튼을 누르곤 내게 떠넘겼다.


"나 남편이 기다린대서 먼저 간다. 괜히 튕기지 말고 진솔한 이야기 나눠. 알겠지?"


희수는 수화기를 귓가에 가져다 대는 내 뒤통수에 대곤 빠르게 말을 쏟아내곤 누가 잡을 새라 집을 빠져나갔다. "하여간 강희수, 사람 정신을 쏙 빼놓네." 현관문이 닫히는 걸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수화기 너머의 그가 "뭐라고?" 되물어왔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돌아온 내가 "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대답하자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퍼졌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

"안 자고 있었어."

"누구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야?"

"아, 친군데 방금 갔어. 남편 기다린다고."

"응... 잘 지냈어?"


일주일만이네? 네가 내게 전화하겠다고 말 한 지, 일주일만이야. 따끔하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취기는 돌고 정신은 몽롱했다. 무엇보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어온 그가 고맙게 느껴졌다. 마음이란 건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게 밉다가도 한순간에 좋아지곤 했다. 나조차 알 수 없는 변덕이었다.


\"뭐, 그럭저럭."

"일이 너무 바빠서, 이것저것 처리할 게 있어서 전화하는 게 늦어졌어, 미안."

"괜찮아. 지금은 좀 한가해졌어?"

"대충은. 급한 마음으로 전화하면 횡설수설할까 봐 도무지 전화를 걸 수가 없더라."

"대단한 기대 같은 거 안 했으니까 그만 미안해줄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나 너네 집 근처인데 잠깐 나올래?"


평소의 나 같았으면 거절했을 법도 하건만 그의 짙고 차분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일주일이나 기다려서. 너무 보고 싶어서... 많고 다양한 이유들로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그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닌데 여기엔 왜?" 하고 묻는 내게 "누가 좀 보고 싶어서." 하는 그의 말을 거절하기란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집 근처 호프집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핼쑥한 그가 맥주 두 잔을 시켜놓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안 나오면 어쩌려고. 내가 전화를 안 받았으면 어쩌려고? 일주일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불쑥 찾아온 그가 괘씸하기도 했지만 금방 다른 마음이 튀어나와 그래도 왔잖아, 여기 있잖아, 하며 내 속상함을 달래왔다.


"나와줘서 고마워. 늦은 시간인데."

"누가 보고 싶었는데?"

"누가 보고 싶었을 것 같은데?"

"난 아닐 것 같은데?"

"보고 싶은 사람 보러 온 건데, 여기에."


그의 간질간질한 말에 얼굴이 확 붉어져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최근에 먹은 술 중에 가장 달고 시원하고 맛있는 술이었다.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고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 내게 그가 휴지를 건네주며 다정한 눈빛을 보내왔다. 유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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