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첫사랑의 온도" 중에서
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너, 술 깨고 나면 후회하지 않겠어?"
술... 술 깨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살피니 전날 밤에 먹었던 맥주캔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설마? 꿈인가? 꿈이겠지? 꿈이어야만 해. 제발! 생각하며 휴대폰을 켜보았지만 야속하게도 내가 그에게 펼쳐놓았던 진상은 꿈이 아닌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통화내역 AM 02:56 서하준 5분 19초]
간밤에 꺼져있던 전화를 켜고 나서 통화내역을 확인한 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자니 휴대폰에 진동이 징- 징- 울려댔다.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들었더니 그에게서 온 두 통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전화를 끊은 직후 온 한 통의 문자와, 1시간 전에 도착한 문자 한 통.
[술 많이 취했네]
[깼으면 해장하러 가자]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술에 취해 전화를 했다는 사실보다도 더 최악인 것은 5분 남짓한 통화에서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이토록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었던가? 때때로 술을 마시더라도 이렇게 취할 때까지 먹은 적은 없었는데, 마음이 힘들어서 더 많이, 더 빠르게 먹은 것이 화근인 모양이었다. 문자에 답장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휴대폰을 다시 끄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그였다.
"집 앞이야."
"그, 미안한데, 내가 상태가 좀...."
"술 먹어서 그런 거잖아. 나와."
"안 될 것 같아."
"네가 술에 취해서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술에 잔뜩 취해서 뭐라고 주절거렸는지, 당연히 궁금했다. 술에 취해 뱉은 모든 말들을 모른 척할 만큼 나는 뻔뻔하지 못했고, 나도 모르는 내 취한 모습을 그가 전부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결국 그를 만나기로 했다. 잔뜩 부은 얼굴을 가리려 모자를 눌러쓰면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데..." 하고 중얼거리면서.
"얼굴, 좀 부었다."
"내가 무슨 말 했는지 말해줘. 물론 취해서 한 말이라 별뜻 없긴 할 텐데."
"너 주사 고약하더라."
"그러니까...! 무슨 말 했는지 말해달라고."
"우선 밥 좀 먹자."
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이 전혀 밉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를 보지 못했을 뿐인데 이토록 반가운 마음이 들다니. 그의 웃는 얼굴을 홀린 듯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물을 마시는 척했다. 그러자 내 앞에 수저를 놓아주던 그가 장난을 치고 싶다는 표정으로, 두 눈에 장난기를 가득 담아 말을 걸어왔다.
"나는 네가 그럴 때마다 날 싫어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 그랬는데?"
"아니더라."
"재밌어 죽겠지? 놀려먹는 거?"
"억울하잖아,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한테 미움 받기 싫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알고 있지?"
말을 말자. 묘하게 중심 주제에서 벗어난 말만 하는 그를 상대할 힘이 없어 그저 입을 다물기로 마음 먹고 물만 들이키고 있으니 식탁에 음식이 놓였다. 김이 펄펄 나는 그릇에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밥만 먹었다. 해장이 필요할 정도로 많이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앞에 있으니 음식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갑갑함이 차올랐다. 밥을 먹다 말고 손으로 가슴을 쿵쿵 치는데,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건너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 걱정하지 마. 다정하게 대하지 마.' 그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 전에 내가 선수를 치기로 마음 먹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그,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지?"
"아, 응. 그렇지 뭐."
"어어, 축하해. 소연이가 말해주더라. 너 여자친구 생겼다고."
"그러니까. 나는 말한 적 없는데 이미 다들 알고 있더라고. 난처하게."
난처하게? 뭐가 난처하다는 건지. 그가 뱉는 아무렇지 않은 말 한마디에도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여자친구 있는 사람을, 뭘 어쩌자고, 아직도 말 한마디에 심장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지. 나는 다시 가슴을 쿵쿵, 내려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쉼 없이 내 눈치를 살폈고, 그런 그를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모른 척을 했다.
"여덟 할 때 '덟'이라는 글자 밑에 들어가는 받침은 리을, 비읍."
"뭐?"
"나 안 취했어, 여덟 할 때 받침은 리을, 비읍이 들어가잖아."
"... 와."
"그리고 사이시옷 있잖아. 걔네들도 규칙이 있는데 사이시옷의 뒤엣말은...."
"그만, 그만!"
식당에서는 내가 술에 취해 무슨 말을 5분 동안이나 지껄였는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던 그는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쳐다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고, 무슨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내가 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얼굴이 확 붉어진 내가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자 웃음을 터뜨리는 그가 이젠 좀 야속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지껄인 건지.' 붉어진 얼굴을 손부채질하며 식히는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그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저녁? 왜. 나 오늘... 바쁜데."
"거짓말하지 말고."
"용건이 뭔데."
"어제 나보고 단둘이 술 먹고 싶다고 말했잖아. 기억 안 나?"
"그럴 리가. 내가 아무리 취해도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하준아, 나는 너랑 술 마시고 싶어. 친해지고 싶어. 단둘이 술 마시고 싶어."
"...알겠어! 알겠어, 그러니까 따라 하지 마."
나의 착각이겠지? 나보다 두 뼘은 더 큰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퍽 따스하다. 두 눈에 담기는 시선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람이, 왜, 내게. 두 눈을 마주하는 짧은 찰나가 영겁이 되기를 바랄 만큼 달콤했지만 안 될 일은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젓고 평정심을 유지한 얼굴로 냉랭하게 그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싸하게 굳어지는 내 표정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내가 쓴 모자를 푹 눌렀다.
"넌 그 표정 바꾸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차라리 고백을 하지 그래?"
"뭐?"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도."
그 순간 내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을까? 거울을 보지 못한 나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목까지 한 번에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고, 그것은 목보다 더 붉은 얼굴을 그 앞에서 들켰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는 붉어진 내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더니 "일곱 시, 호프집으로 와" 말을 꺼내놓고는 사라졌다.
혼란스러웠다. 그를 마음속에 품은 이후 한순간도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그를 떠올리는 순간에도 마음이 널을 뛰었고, 멀리서 그의 목소리라도 들려오면 온 신경이 그에게로 향했고, 함께 나란히 서는 순간이라도 오면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오를 것처럼 팔딱거렸다. 그리고 내 마음을 전부 들켜버린 지금은, 아주 작은 쥐구멍에라도 숨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게 되었다.
어떡하는 게 좋을까? 어떡하고 싶은 걸까. 천장을 쳐다보며 스스로에게 한참을 물어봤지만 아무리 물어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냥 딱 잡아떼고 뻔뻔하게 '술 먹고 전화했을 뿐'이라고, '그냥 술김에 뱉은 말인데 뭘 의미를 두냐'고, '의미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달콤한 말을 아무에게나 한 번쯤 뱉어보는 게 주사 아니냐'고 철면피처럼 나가볼까 싶다가도, 나를 쳐다보는 그의 두 눈을 떠올리면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런 온갖 결심이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티날까 봐 얼굴조차 쳐다보지 못하는데 뭘 어쩔 수 있는데, 네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흘러가는 시간을 모른 척하려고 애써 시계를 보지 않고 있어도 멈출 생각 없는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만 갔다. 이른 점심에 그를 만나고 돌아와 이불 위에 잠깐 누워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가 호프집에서 만나자고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기 싫은 마음과 너무나도 가고 싶은 마음이 싸워 자꾸 행동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를 너무도 보고 싶어서, 다시 한번 그 어여쁜 얼굴을 보고만 싶어서 당장 호프집에 달려가고 싶다가도 "우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듯 다른 여자들의 이름과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서 있을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들이 떠올라 이불 속에 숨고만 싶어졌다.
가기 싫은 마음보다 가야 한다는 마음이 1퍼센트 앞서서 꾸역꾸역 호프집으로 향하는 길.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묘하게 들떠 있는 것 같아 퍽 우스웠다. 처량해졌다. 나는 새로 산 틴트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워버렸다. '오버하지 마, 한우주.' 스스로를 달래는지 혼내는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호프집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뒤통수가 삐죽 솟아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쿵쿵, 또 심장이 뛰었지만 심호흡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이미 맥주를 주문한 건지 혼자 반쯤 비워진 맥주잔을 앞에 두고 있었다. 반쯤 비워진 맥주잔을 보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미안, 요즘 맥주가 좀 맛있어서"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으로 말을 건네왔다.
"맥주 마실 거지?"
"좀 불편한데. 여친이 나랑 있는 거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오늘은 그냥 좀 마셔 주라. 응?"
그의 두 눈이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짙게 젖어 있다고 생각한 건 나의 오만이자 착각이었을까. 뭐가 그리 힘든지 알 수 없는 그 어여쁜 얼굴로 해오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나의 앞에도 생맥주가 놓였다.
깊게, 오래,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통하는 점이 많았다. 우선 좋아하는 영화가 똑같았고, 좋아하는 영화 스타일도 같았으며, 영화 속 장면에서 나오는 흔하고 진부한 클리셰를 좋아하는 것마저 취향이 닮았다. 그는 침묵 속으로 찾아오는 잡념이 힘들다는 듯 계속해서 무언가 말을 걸어왔고, 나는 그런 그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묘하게,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즐거운 자리였다.
"설명할 수가 없어.... 모두에게."
"그래서 힘든 거야?"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내가 뱉은 말들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깨닫게 되는 것 같아."
"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퍼?"
"슬퍼 보여?"
"원래도 마냥 가벼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어. 모두에게 친절히 대하면서도 은근히 벽을 두는 느낌이었지. 항상 밝은 척 웃고 있어도 그 웃음이 너무도 가벼워서 후 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았지. 내가 보는 넌, 언제나 위태로운 느낌이었어."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내 눈에, 머리칼에, 맥주잔을 잡은 손에, 어깨에, 목덜미에 곳곳에 닿는다. 그가 닿는 몸의 구석구석이 하얗게 불타는 것만 같아서 얼굴이 확 붉어졌다. 취기가 오른다는 생각에 맥주잔을 내려놓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래서, 나랑 술 먹고 싶었던 거야?"
"어?"
"단순히 내가 궁금해서 술 마시고 싶었던 거냐고."
한 컵의 냉수를 쭉 들이킨 내가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깊은 눈도, 쌍꺼풀이 없는 눈매도, 날카로운 콧대도, 오른쪽 눈 아래에 있는 점도, 다른 사람보다 약간 작은 듯한 귀도. 모두가 다 내 마음 가운데로 들어와 진동한다. 속절없이 깊어지는 마음의 깊이를, 이제는 모른 척할 수가 없다. 바늘에 콕콕 찔리는 듯한 진동을 느끼는 것 또한 아픔이라고 생각한 반면, 그는 내 시선이 와 닿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듯 멍하니 나를 보고 있을 뿐이다.
내 시선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듯 빤히 나를 보는 그에게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술기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주사였는지도 모르고, 그래, 어쩌면 그 때문에 설렜던 많은 밤이, 그만큼 슬펐던 시간들이 떠올라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에게 친절히 대했던 모든 시간들이 그저 주변의 여자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친절이라는 일 따위, 이제 모르지 않지만. 지금 이렇게 둘이 술을 마시는 일 또한 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가 나를 더 이상 편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그 모든 감정들이 어지러이 한데 묶여 어떤, 못된 심보 같은 게 불쑥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알고 있잖아, 좋아하는 거."
"뭘?"
"내가, 너를."
"응? 네가 나를?"
"몰랐을 리가 없어. 네가 쳐다보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데 몰랐다고? 그건 기만이야."
테이블 앞으로 몸을 당겨와 있던 그가 당황한 듯 뒤로 몸을 젖힌다. 이 상황에서 한 발 빠지고 싶다는 뜻이다. 목구멍 끝에서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던 가벼운 말 한마디를 꺼내놓았을 뿐인데,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는, 이제 모른 척으로 일관된 그 가벼운 태도로 나를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고백을 하는 동시에 난, 언제든 상처받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가 된 것이니까.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저, 편하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한우주!' 하고 소리쳐 부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고백 이후로 시간은 어색하게 흘러갔다. 나의 직접적인 고백을 들은 이후로 그는 더욱 멀어졌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를 피한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서 나도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오가다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죄를 지은 사람처럼 서로를 멀리했다. 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고백 하지 않았더라면, 혼자의 마음으로 남겨두었더라면… 그와 어색하게 지나치는 모든 순간마다 후회를 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오랜 소꿉 친구가 있었는데, 함께 자라 너무도 소중했던 그 친구가 이민 가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며 고백을 했다고. 곧 떠나야 하는,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친구의 부탁을,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떠나기 전까지만이라도 마음을 받아달라는 부탁에, 그는 고마운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받아주었다. 그는 친구에게 정식으로 사귀는 게 아니니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지만 친구는 이미 마음 가득 차오른 행복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알게 되었고, 나도 알게 되었다. 그의 친한 친구라는 사람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야 그가 왜 그토록 난처해했는지, 왜 슬퍼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친절이, 다정함이, ‘우주야-’하고 부르던 것이 모두 죄가 된 것만 같았다. 가장 나쁜 건 내 고백을 들은 뒤로부터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는 그 태도였다. 나 역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고 그저 모른 척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한 달이 흘렀다. 더운 바람이 불던 계절이 바뀌어 어느새 선선한 공기가 되어 피부에 닿았다. 곧 시험 기간이네, 생각하며 몸을 움츠린 채로 걷던 어느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우주야!”
어디서부터 뛴 건지 알 수 없게 땀에 젖은 그였다. 내내 모른 척을 하더니 이제 와서, 왜? 머리로는 괘씸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은 그를 좋아했던 사실을 숨길 수 없다는 듯 쿵쿵, 북소리를 냈다.
“웬일이야?”
“좋아해.”
귓가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애써 누르며 퉁명스럽게 묻자, 그가 재채기를 하듯 고백을 뱉었다. 뭐? 되묻자 그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했어, 그 동안.”
“너, 여자친구랑은…”
“다 설명할게. 30분만, 딱 30분만 시간 내줄래?”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넘어가는 노을 때문인지, 한참을 달려왔기 때문인지, 나에게 고백을 해서 그런건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노을이 완벽한 어느 가을날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