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첫사랑의 온도" 중에서
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것이 시작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어느새부터 그의 향기를 짙게 맡을 수 있었고, 그것은 어떤 것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였다. 수많은 냄새 속에서 그의 냄새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향기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깨달았다. 아, 이미 시작되었구나.
처음에는 부정했다. 아닐 것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다. 그것은 꽤나 격렬한 징조를 누르려는 시도였으나, 그런 시도는 커진 풍선을 짓누르는 것과도 같아서 작아질 생각 없이 옆으로 몸집을 크게 늘려만 갔다. 처음 그것들은 마음속이나 머릿속에서 조각난 형상들을 하고 있었다. 예컨대, 허공을 보며 '더워지니까 냉면이 먹고 싶네, 내일은 냉면을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젓가락질을 하던 그의 길다란 손가락이 생각나고, 쭉쭉 뻗은 길다란 손가락을 음미하듯 떠올리고 있으면 나보다 한 걸음은 더 빠를 듯한 그의 큰큰 보폭이 생각나고, 그가 걸어가던 걸음걸이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클 수밖에 없는 긴 다리가 생각났다. 긴 다리를 떠올리고 있노라면 저벅저벅 걸어다니던 그의 발소리가 귓가에서 울렸고, 그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의 어깨가, 그의 향기가,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종국엔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엔 조각난 퍼즐처럼 한 장면씩 떠오르던 그의 모습들이 결국 큰 형상을 만들어내면 나는 어쩌지 못하고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보며 웃던 그 작은 눈. 쌍꺼풀이 없는 작은 눈이 어여쁘게 반달로 휘어지는 그 순간. 어쩌면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매일 밤 떠올리게 된 수많은 시간들의 첫 시작.
그는 일반 사람들보다도 키가 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속에 있어도 우뚝 솟아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여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순간에도 우뚝 솟아 있는 그를 '어쩔 수 없이' 보고 의식하고 있노라면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그가 하는 자극적이지 않은 수수한 단어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왔고, 그런 말들을 음미하고 있으면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하루가 흘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환하고 밝은 사람.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는 사람. 마음속에 그가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 순간부터 꾸준히 부정하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그를 향한 내 마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여긴 순간부터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마음은 멍하니 있는 순간에도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숨을 잠깐 참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를 그만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허공에 그가 지나가듯 내게 했던 모든 말들이 둥둥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우연히 곁에 서 있는 날엔 내 마음을 들킬까 봐 무던히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만 했고,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장난들도, 인사들도, 선물들도, 말들도, 웃음도 그 앞에서는 잦아들었다. 내가 나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는 건 그에게 고백하는 일과 다를 것이 없다고 모든 행동들을 조심하고 덜어냈지만, 이미 그 모든 행동들이 그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매일 밤 잠들기 전 그의 얼굴을, 손가락을, 긴 다리를, 뛰어다닐 때면 휘날리던 머리칼을, 하얀 셔츠를 입은 뒷모습을, 휘적휘적 걸어가던 발걸음을, 낮은 목소리를, 장난스러웠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으면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기침하듯 톡, 그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너를 좋아해, 많이 좋아해. 네 목소리도, 걸음걸이도, 손가락도, 웃을 땐 휘어지는 그 두 눈도 나는 정말, 너무 좋아." 하고 한순간 우수수 쏟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1분도 되지 않는 찰나에 뱉어버릴 수 있는 그 작은 말들이, 그의 곁에 설 수조차 없게 만들까 봐 두려웠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좋았던 시간들마저 앗아갈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불쑥 내 앞으로 다가와 두 눈을 보며 "너는, 나를, 왜 싫어해?" 라고 힘주어 물었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전혀 싫어하지 않았고, 좋아했고, 밥을 먹을 때에도 책을 읽을 때에도 온통 그의 생각을 하느라 좀처럼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는데, 싫어한다니. 내가 벙찐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의외라는 듯 본인의 맥주잔을 내 맥주잔에 부딪혀오며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웃기도 하던데, 내 앞에서만 항상 이런 얼굴이잖아."
시끄러운 술집 속, 우리는 열 명이 넘는 인원과 함께 술자리를 하고 있었고 적당히 친한 사람들과 시시덕거리며 농담이 섞인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불쑥 내 앞에 술잔을 들고 찾아온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내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도 적잖이 놀랐지만 그보다 훨씬 놀라운 것은 내가 본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를? 토끼눈이 되어 그에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오버하는 것도 내 마음을 들키는 일이 될까 싶어 한 템포 숨을 고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꺼냈다.
"안 싫어해."
"그럼?"
"... 싫어하진 않아."
"다행이네."
싱긋 웃어보일 때 휘어지는 반달눈에 내 얼굴이 화악 붉어지는 것 같아 서둘러 맥주잔을 들었더니, 그가 다시 살얼음이 낀 맥주잔을 부딪혀왔다. 얼떨결에 맥주잔을 부딪히고 차가운 맥주를 들이키며 뜨거워진 얼굴을, 하마터면 톡 하니 튀어나올 뻔한 내 진심을 삼켜야만 했다. 그의 주변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좋아했고, 함께하는 것을 즐겼다. 반면에 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버거웠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걸어오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길 만큼 친화력이 있지 못했다. 그래서 괜찮았다. 그와 함께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별볼일 없는 한 사람이 되어 그를 쳐다볼 수 있어도 괜찮았다. 그저 멀리서 그가 웃고 있는 모습만 보아도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던 그날부터 그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그는 자신에게 적대심을 갖고 있는 듯한 내게 관심을 보였다. 사실 그것은 적대심이 아니라 마음을 들키기 싫은 방어기제에 불과했지만,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내가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그런 오해가 생기는 바람에 그는 내가 자신을 싫어할 수 없도록 어딜 가든 구석에 있는 나를 챙겼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꾸만 내 이름을 불러댔다.
"우주야, 이리 와, 같이 먹자! 우주야, 우주야, 한우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것이 싫으면서도 싫지 않은 느낌.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를 특별히 생각한다는 달콤한 착각.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올 때 그의 곁에 있던 주변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았고, 그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발음되는 세 글자가 마음을 간지럽혀서 다른 시선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모르고만 싶었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 그 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닿지 않는 공상 속에서 몇날며칠을 살아냈을 것이다. 멍청하게.
"몰랐어? 하준이 여자친구 생겼잖아. 얼마 전에."
친구의 말을 곱씹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전혀 알지 못했다. 어디서든 내가 보이면 "우주야" 하고 큰 소리로 소리쳐 불렀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다른 여자가 스며들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오만한 착각 때문에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대비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건, 나는 그저 그의 입에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여러 명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힘들게 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치욕스럽기도 한 것 같은 감정. 불쑥 그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나를 불러댄 거야, 도대체 왜.'
"전혀 눈치채지 못한 네가 바보지. 여자 많은 거 정말 몰랐어?"
멍청한 얼굴로 친구를 쳐다보자 정말 몰랐냐는 듯 친구가 말을 이었다. 굳이 확인 사살을 하는 친구가 야속했다.
"여자가 많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놀란 얼굴로 되묻자,
"그 얼굴에, 그 피지컬인데 당연히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지 않겠어?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만 한 트럭일 걸. 설마, 너도 걔를 좋아했던 건 아니지?"
친구의 말에 고개를 저었지만 친구는 믿지 않는 눈치였고, 더 이상 거짓말로 내 마음을 속일 수 없었던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주 어색하게 자리를 떴다. 그게 벌써 며칠 전 일이다. 그 말은 곧,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는 뜻이고,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혀 알지 못했다. 여자가 많다니?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에게 여자로서 잘 보이고 싶었지만, 나 같은 여자가 많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적당히 쳐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없을 땐 내 이름처럼 다른 여자들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오르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많은 시간 동안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던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비에 흠뻑 젖은 생쥐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듯 보였다. 입이 텁텁했다.
"왜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어?"
며칠 동안 일방적으로 그를 피해다녔다. 그와 어쩔 수 없이 같은 공간에 있어야 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일방적으로 숨었고, 그의 옆에 서야 하는 순간이 오면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그 자리를 대체했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의 옆에 서있는 순간보다 힘든 것은 없을 것 같아 일방적으로 그를 피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는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았다. "우주야" 하고 소리치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런 서운한 마음들이 커져 그를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나를 다잡았다. 아니, 내 마음을 그렇게 다잡아가고 있는 줄 알았다.
"아, 좀 바빠서."
그의 말에 시큰둥하게 답변을 하며 그를 지나쳤다. 몸을 빙글 돌린 그가 일방적으로 나를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왜? 뭐가 바쁜데?" 자꾸만 쓸데없는 것을 물어왔고, "그냥 좀..." 하고 말을 얼버무리던 나는 불쑥 화가 치밀어 올라 바삐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졸졸 따라오던 그를 마주보았다.
"따라오지 마."
"왜?"
"네 여자친구 오해 사는 게 싫어."
그때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표정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귀찮다는 듯 말을 툭 던져놓고 그가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고, 어쩐지 그와 한 공간에 있을 일도 점차 줄어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얼굴을 멀리서조차 볼 수 있는 날이 없었다. 어쩌면 그도 나를 일방적으로 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불편한 마음이 피어올랐던 걸까. 그가 무어라고 말하는지 들어볼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었던 걸까. 유독 마음이 힘들었던 어느 날의 나는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빈속으로 과음을 했고, 내가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술이 술을 먹은 지경까지 가버렸다. 그때의 내 이름은 '한우주'가 아니라 '소주 세 병'으로 불려야 마땅했다. 그 정도로 술에 취했던 나는 맨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번호를 모르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기는커녕 문자를 보낸 적도 없었는데, 무슨 용기가 생긴 건지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여보세요"
하고 낮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을 때 전율이 일었다. 실제로 듣는 그의 목소리도 달았지만 작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더욱 달콤했다. 순간 온몸을 감싸는 작은 소름에 온몸을 떨었지만 취한 나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한 나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몇 마디의 말을 던져놓았고, 처음엔 졸린 듯한 그의 목소리가 금세 잠에서 깨어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너, 술 깨고 나면 후회하지 않겠어?"
술... 술 깨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살피니 전날 밤에 먹었던 맥주캔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설마? 꿈인가? 꿈이겠지? 꿈이어야만 해. 제발! 생각하며 휴대폰을 켜보았지만 야속하게도 내가 그에게 펼쳐놓았던 진상은 꿈이 아닌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통화내역 AM 02:56 서하준 5분 1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