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별을 준비하는 태도
오늘도 조식으로 시작하는 아침!
어제 내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느라 피곤했던 탓인지 간밤에 단잠을 잤다.
어제 내내 맛있는 것을 먹어 아침에도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오늘은 '호균투어'가 예정된 날.
송광사도 둘러보고, 낙안읍성도 한 바퀴 돌아보려면 배를 든든히 채우는 게 낫겠지,
싶은 마음에 좋아하는 반찬을 듬뿍 담았다.
도토리묵, 콩나물무침, 오징어젓갈, 김치까지.
그 무엇하나 거르지 않고 내가 다 좋아하는 반찬이라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먹었다.
밥을 한참 먹고 있으니 고기랑 같이 먹으라며 추가 반찬을 내주셨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맛있게 먹었는데,
안 좋은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복선입니다)
10시에 스테이두루 1층에 모여
우리가 처음 향한 곳은 '송광사'
낮엔 아직까지 30도가 넘고 무더운데
나무는 벌써 가을을 준비하는 모양인지
푸르던 잎들이 하나둘씩 색이 바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멤버 중 한 명이 지인을 데리고 온다 하여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작고 귀여운 고양이 두마리가 나타나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애앵- 애앵- 하고 작은 목소리로 울었는데
어찌나 작고 구슬픈지 달랑 들어 데리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이미 콩이와 나물이를 키우고 있으니.
이성을 붙잡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송광사에 본격적으로 올라볼까!
오늘도 날이 무척이나 덥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광사 투어를 하기 위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불안한 예감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일어날 때부터 신호가 오는 것 같던 배가
결국 나는 당장 화장실에 가야겠어!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송광사에 함께 오르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게 된 것.
색색이 알록달록한 송광사를 코앞에 두고
못 올라가겠다고 생각이 든 나는
배가 아파서 못 올라가겠으니 나를 두고 다녀오라며 말한 뒤 송광사 초입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카페가 있어서.. ^-ㅠ
카페에 들어가 아픈 배를 달래줄 매실차를 주문했고
여수 바다를 볼 때 보고싶었던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반가워 하시면서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다했냐며 기뻐하셨다.
여수에 가니 바다가 예뻐 전화를 했더니
별일 아니어도 이렇게 전화 자주 하라며 웃으셨다.
어쩌면 내가 배가 아팠던 건
아빠와 통화를 하기 위함이었던걸까.
모든 건 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 되는 거니까.
그 다음으로 우리가 간 곳은 '남도사또밥상'
송광사 다음으로 낙안읍성을 갈 예정이었던 우리는
낙안읍성 바로 앞에 있는 식당으로 왔다.
짱뚱어탕은 순천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는데,
추어탕 맛이라 하여 나는 '꼬막비빔밥'을 주문했다.
전라도답게 다양한 반차이 먼저 깔리고,
이윽고 꼬막무침과 짱뚱어탕이 차례대로 식탁에 놓였다.
오전에 내내 배가 아팠던 터라 만족스럽게 먹진 못했지만 맛있고 건강한 한끼를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우리가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낙안읍성커피'
사장님께서 레고를 좋아하시는지 다양한 레고가 전시되어 있었다.
테이블은 넓고 가게가 쾌적한데
평일이라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10년 전 홀로 내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낙안읍성을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봤던 낙안읍성이 좋아 다시 한 번 갈 예정이라고
'초대계획서'에 썼는데,
호균님이 자긴 안 봐도 되지만 '양고'님은 보고 오시라며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배탈이 나 몸에 힘이 없었고
어제 많은 걸 보고 온 탓에 오늘은 좀 쉬고 싶었으므로
우리는 뜨거운 해를 피해 카페에 앉아 한참동안이나 쉬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16시부터 다른 일정이 있었기에
우리는 낙안읍성을 제대로 둘러보는 대신 외곽을 따라 걷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외곽을 따라 걷기만 해도 좋은 시간.
분명히 한낮은 햇빛이 무척 뜨거운데
왠지 모르게 가을이 느껴지는 건 절기상 처서가 지났기 때문에 느끼는 계절 감각인걸까
아니면 실제로 가을로 저물어 가는 길목에 서있기 때문인걸까.
주말엔 동생들이랑 '초대주간'을 보낼 예정인데,
그땐 낙안읍성 안까지 꼭 구경하리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두 눈이 동그란 새끼 고양이를 봤다.
모든 새끼들은 다 귀엽다.
세상에 때묻지 않아 지켜주고 싶다는 모성본능 때문인걸까.
아주 잠깐, 스치듯이 보는 수 많은 고양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나물이가 생각난다.
(맞습니다 고양이자랑)
낙안읍성을 '찍먹'한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숙소로 돌아왔다.
다른 멤버들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하는 듯 했고,
나는 홀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기록하기로 마음 먹고 나니
중간에 붕 뜨는 시간도 알차게 활용할 수 있어 좋다.
모든 생각은 휘발되기 마련이라
글로 적어두지 않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날아가버리니까.
내가 호균투어 멤버들과 함께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지 않았던 건,
나 역시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약속은 룸메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일.
룸메는 다양한 협찬을 주기적으로 받는,
말하자면 '프로 협찬러'인데 이번엔 뷔페가 되었다며
같이 가자고 말해주어 함께 가게 되었다.
그저 뷔페에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인 줄로만 알았으나 도착하고 보니 결혼식장이었다.
반짝거리고 화려한 조명과
누군가를 축하해주기 위한 마음으로 장식해두었을 수많은 꽃들이
어찌나 어여쁜지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20대에도 물론 주변 친구들이 결혼을 하긴 했지만
30대가 되면 결혼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다.
훨씬 더 무겁고, 현실적이고, 피부로 와닿게 된달까.
우리가 받은 협찬은
마리나 웨딩 컨벤션이 리모델링 했다는 소식도 알리고,
고객 감사 이벤트를 진행하는 날에 맞추어 받게 된 것이었는데
해당 컨벤션에서 결혼을 진행했던 부부와 가족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룸메를 따라온 것이기 때문에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행사 멘트가 끝나길 기다렸고,
'이제 식사하셔도 됩니다' 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른 달려나가 각양각색의 메뉴를 접시에 하나씩 올렸다.
다양한 음식이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맛있었던 건 스테이크.
친구는 배탈이 났었으니 양념이 없고 소화하기 무리 없는 걸로 골라 먹으라고 했지만
뷔페에서 누가 그런 것만 골라 먹나요.
나는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것들로 잔뜩 담았다.
룸메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 뒤 다양한 메뉴를 입에 넣고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싶더니
이윽고 빗줄기가 되어 창문에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지나가는 비겠지? 싶은 마음에
창밖을 주시하며 계속 식사를 하는데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았고,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이후에도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에게는 우산이 없었고,
룸메이트가 챙겨온 작은 우산을 쓰고 둘이 가기엔 빗줄기가 꽤나 거셌다.
컨벤션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택시를 불렀지만,
우리처럼 빗줄기에 발이 묶인 사람이 많은 모양인지
여러 번을 시도해도 택시는 도무지 손을 뻗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버스를 잡아타기 위해 작은 우산 하나를 겨우 쓰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비에 젖은 낙엽을 밟아 미끄러질 뻔하며, 온몸에 힘을 주고 바닥을 보며 조심조심 걸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상황이 짜증날 수도 있었겠지만,
뭐가 웃긴지 우리는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내내 깔깔거리며 여고생처럼 웃었다.
'타지에서 이런 경험을 언제 해보겠어', 하는 생각과
'이 경험담을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줘야지!' 하는 생각 때문에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로 받아들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일이면 초대주간이 시작되어,
많은 멤버들이 금요일부터 '스테이 두루'를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오늘은 몹시 피곤해서 기절하듯 잠들고 싶었지만,
어느덧 불쑥 찾아온 이별의 전조현상 앞에서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잔뜩 담아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막걸리를 마시며 짧게만 느껴지는 3주간의 순천 생활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다음 주면 아카이빙을 제출해야 하는 마감일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아카이빙도 해야 하고 막걸리도 마시고 싶어서,
스테이 두루 1층에 앉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노트북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벌써 순천살이 3주 차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