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문득 그립고 때로 서러운 이름
어렸을 때 기억 시점 이후로 이사를 여섯 번 했다.
전학을 두 번하느라, 입학한 학교, 일 년 다닌 학교
그리고 졸업한 초등학교가 모두 다르다.
하여 어릴 적 소꿉친구는 물론, 연락하고 지내는 초등학교 동창도 없다.
아버지가 군인이었거나 엄마가 부동산 정보에 밝아서 그랬으면 좋을 뻔했지만 거리가 멀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동네는
지금은 강북구로 바뀐 도봉구 미아동이었다.
그 곳으로 가게 된 이유는 몇 번인가 엄마에게서 들었던 것 같다.
막내 이모가 사는 동네였는데
이모부 직장이 동두천이라 그 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늘, 이모에게 고마워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이모를 좋아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모를 좋아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이모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된 것 같다.
한국 정서로는 고모보다 이모가 한결 정감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느낌을 잘 모른다.
이모가 한동안 이모부 직장 가까운 곳에 가서 사느라
살던 집을 엄마에게 무상으로 빌려준 적도 있었고
작게는 소소한 주방용품이나 가재도구들을 주기도 했다.
엄마가 이모에게 고마워하는 이유 중에 그런 것들이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기간이 정해진 게 아니라서 언제든 다시 돌아올 때 세를 빼고 말고 하는 일이 번거롭고
비워놓았으면 집이 망가졌을 텐데
우리가 들어가 살았으니 오히려 고마워할 사람은 이모다.
주방용품이나 가재도구들도 그렇다.
새 것을 준적은 없다.
대부분 미군부대에서 살 수 있는 좋은 물건들을 쓰다가
싫증이 나서 바꿀 때면 엄마에게 넘기는, 그런 식이었다.
나는 우리가 거지도 아닌데 쓰던 물건을 주면서 생색을 내는 이모가 싫었다.
하지만 엄마는 동생이라도 이모를 의지하며 살고 싶어서 미아리로 이사를 한 거라고 했다.
지난겨울, 엄마가 집에 왔을 때
주민등록 초본을 떼서 지난 주소 내역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이문동으로는 왜 간 거야?”
초등학교 삼 학년까지 살던 신촌 집에서 이사를 한 동네가 이문동이었다.
이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넓은 양옥집이었는데
방이 세 개에 마당도 넓었다.
방 하나는 오빠가 쓰고 하나를 세 주기로 했는데
들어올 사람이 결정되기 전까지
그 방에 내 물건들을 갖다 놓고 잠시 내 방을 가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내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잠깐 동안의 내 방’이었다.
그 곳에서 꼭 일 년을 살고 이모가 사는 동네로 다시 이사를 했다.
“으응, 땡기 아줌마가 거기 살았잖아. 땡기 아줌마 알지? 큰엄마 언니.”
“....?”
생각지도 못한 엄마의 대답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왜 늬들이 땡기 아줌마라고 불렀잖아.”
큰엄마는 세 자매 중 막내라고 했다.
어느 시점엔가 큰엄마네 집에 가면 가끔 보던 아줌마였다.
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다고 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순수하고 때로 귀여운 면이 있는 큰엄마와는 다르게
얼굴이 희고 차분하며 말을 조리 있게 하던 분으로 기억한다.
어쩌다가 땡기아줌마라고 부르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그 집 아들 이름이 땡기는 절대 아니다.
별명을 부를 만큼의 관계로 지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땡기아줌마는 사돈지간이었다.
5년 전 큰엄마도 세상을 떠났고
그 훨씬 전부터 이미 잊고 지냈던 땡기 아줌마라는 이름이 새삼스러웠다.
“아니, 그 아줌마가 왜?”
“뭐, 그렇게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좀 의지가 될까 싶었지.”
“......”
가슴 한켠에 묵직한 것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막막했으면 피붙이도 아닌 사돈의 동네까지 갈 생각을 했을까.
재작년 이었나? 결혼 전까지 살던 동네에 갔었다.
옛시조에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라고 했던가?
그 곳에는 인걸도 간 데 없고 산천도 개벽을 했다.
집뿐 아니라 동네 자체가 지각변동이라도 하듯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 단지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의 팍팍했던 시절은
이제 그 곳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