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청소를 하다가
책상 속 깊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외장하드를 발견했다.
열어보고 나니 언제 이런 걸 여기에 저장을 했었나 싶은 파일들이 줄줄이 쏟아진다.
그 중 단연 새삼스러웠던 것이 미국에서 찍었던 사진들인데
5D 카메라로 팔꿈치 에러까지 나면서 찍은 것은 대부분 풍경사진인데 비해
신주단지처럼 끼고 다니던 아이패드로는
교실 풍경, 집 근처 길거리, 공원,
자주 가던 스타벅스 등 자잘한 일상 사진들이 많았고
그 중에도 귀국날짜가 다가오면서
아침마다 등굣길 차 안에서 찍었던 동영상을 보자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애틋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정리된 대화를 유도해 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마음만 앞서서는 조수석에 앉아서
잠 덜 깬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고 혼자 들떴다가 제 풀에 접는 모양새였다.
2012년에 K의 1년 과정 연수에
가족이 모두 같이 미국에 갔었다.
외국 영화배우 이름만큼이나 생소한 지명 또한 쉬이 입에 붙지 않아
물어보고 까먹고 다시 묻기를 되풀이했던,
샌디에이고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미국 최고의 휴양지라고도 했고
은퇴 후 살고 싶은 도시 1위라는 말도 들었던 것 같다.
큰 아이는 절묘하게도 군 제대 시점과 타이밍이 맞았고
작은 아이는 그 곳에 가서 한 달 후 성인이 되었다.
즉, 아이디카드를 보여주고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사진파일을 보다가 문득 그게 올해로 10년이 되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 때 스물두 살이었겠네.. 오마이갓! 그럼 지금 서른두 살...
그 사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까지 했으니
10년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대견하기도, 고맙기도 하고
그 사이 임피를 거쳐 퇴직을 한 K와
뒤늦은 사춘기와 사추기를 겹쳐 치러냈던
나의 폭풍같던 시간이 애잔해 마음이 복잡한 나와는 달리
‘나는 모르는 일이야.’라는 이모티콘과 함께 쓴 아이의 말은 매우 담백했다.
서른둘이뭐 어때서...
그...그치..
무작정 미국을 동경했던 적은 없지만
그 곳에서의 일 년이 내게 매우 큰 의미가 된 이유는 많다.
중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아이들은 한 집에 살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여행은 고사하고 외식을 하기 위한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하루 중 유일하게 모여 앉는 시간이 아침식사 때였지만
밥맛인지 입맛인지 모르면서 밥을 욱여넣고는
제각각 집을 나서기 바빴다.
그랬던 가족이 아침마다 한 차로 가다가 차례대로 학교에 내렸다가
학교가 끝나면 마치 조직원 수거하듯 다시 차에 타서는
그 날 있던 일들을 얘기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매일 세 끼를 함께 먹었고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기도 했으며
식재료를 사러 마트에 갈 때나 옷이나 신발 사러 아웃렛에 갈 때도 우르르 몰려갔고
식사 준비는, 아침은 내가 점심과 저녁은 아이들이
그리고 설거지는 K가 담당하여 순조롭게 돌아갔다.
목요일 오후, 학교가 끝나면 여행을 떠났다.
경비를 아껴느라 아이들이 눈 빠지게 찾은 가성비 좋은 호텔 조식을 기대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보며 땅덩어리만 큰 이기적인 나라라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우리는 늘 좀비처럼 몰려다녔다.
그 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과 스물네 시간을 함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터다
물론 그 곳은 미국이 아닌 어디라도 마찬가지였을 수도 있겠다.
그 곳에 사는 동안에는
오십이 된 여자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거나 땋거나 꼬거나 모자를 써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발가락 샌들 밖으로 탈출하는 발가락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볼품없는 몸매로 스키니진을 입었다고 힐긋거리는 눈길도 없었다.
낯설고 물선 그 곳이 이상하게 편했다.
미국이라서 편한 건지 한국이 아니라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그 때가 가장 나다운 모습이었을지도 몰라, 했다가
아니지, 어쩌면 미국식 눈치를 챙기지 못해서 나만 편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는
그런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어쨌든 그 곳에 살 때 나는 참 좋았다.
서른두 살이 뭐 어떠냐는 말에 당황했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서른두 살이 뭐 어떤 게 아니라
아이의 스물두 살 그 때가 엄청 좋아서 그랬나보다.
지나간 시간은 다 그립지만 특별히 그 때는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