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레이 아나토미 한 장면의 대사가 잊히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겠냐는 의사의 말에 환자의 보호자가
“후회는 매일 하면서 살아요
돈을 들여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어요.“
라고 말했다.
차박캠핑을 하면서 살고 싶다며
꼬맹이 차를 소형 RV로 바꾼 지 삼 개월 차다.
사실상 자동차 수급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서
계약을 한 날부터 따지면 이미 칠 개월이나 지났다.
사 개월 가까운 기다림 끝에 차가 나왔을 때는
7월 말, 폭염의 기세가 날마다 갱신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진정한 캠핑러였다면
폭염인들, 폭우인들 문제가 되겠나마는
나나 K는 그 무렵 행여 녹아내릴 까
걸음조차 조심히 내딛고 있었다.
정작 날이 선선해질 무렵부터는
K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찔끔찔끔 사들인 캠핑 용품은
차 트렁크에, 다용도실에, 베란다 선반에 고이 모셔두었다.
아직도 캠핑은 시작하지 못했다.
온라인으로 구입한 도킹텐트라도 펼쳐보자며
잠정적으로 정했던 날에는 갑작스러운 한파가 몰아 닥쳤다.
일교차가 심해져 이제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며
일박은 그렇고 당일로 가까운 바닷가에라도 가자고 했더니
K가 몸살이 났다.
아무래도 이 번 해에는 틀렸나보다며
드라이브라도 하면 안 되겠냐고
애절하게 호소한 끝에야
일요일 오전,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물이 들다만 단풍은 애매한 빛깔로 을씨년스럽게 달려있었고
들판에는 소리 소문도 없이 이미 추수가 끝나 있었다.
뿌옇던 시야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맑아졌고
하늘은 말 그대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빛이었다.
어제 저녁 두 시간도 넘게 했던 아이와의 통화 얘기를 했다.
-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길게 얘기를 하고 나면,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
- 듣고 보니 좀... 그렇긴 하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많이 한 거 같아.
- 그렇지? 전에는 오히려 당신한테 보다도 더 속을 다 보였는데......
갑자기 가슴 안에 서늘한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 이제부터는 길게 통화하지 말아야겠어. 침묵이 어색해서 자꾸 이말 저말 하다보면 그렇게 되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아이였다.
마음이 깊고, 넓게 볼 줄 알아서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아이,
어쩌면 살면서 내가 준 위로 보다 아이에게서 내가 받은 위로가 더 클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파주에서 연천으로 넘어가 재이 폭포에 가는 길에 베이커리 카페에 들렀다.
빵도 사고 점심도 먹을 생각이었는데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K는 커피를,
나는 커피와 그곳 시그니처 메뉴인 율무라떼를 놓고 격렬하게 고민하다가 라떼로 결정했다.
커피는 하루에 한 잔만 마신다는 내 나름의 규칙 때문이었는데
주문했던 메뉴를 받아 들고 서야 오늘 아직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는 깨달음이 번뜩.
‘아! 커피로 주문했어야 했어.’
내딛는 걸음걸음이 후회다.
가끔 한 번씩 K는 이런 말을 한다.
직장생활을 할 때 보험을 많이 들었어야 했어.
젊을 때 여행을 많이 다녔어야 했어.
차 나오자마자 무조건 한 번은 떠났어야 했어.
어릴 때 악기 하나라도 배워 놓을걸 그랬어.
내가 보기에 K는
시간을 돌려 어리거나 젊거나 직장생활을 할 때이거나 방금 차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결국 똑같은 선택을 되풀이 할 것이 분명하다.
K는, 선택은 선택이고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잊는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후회는 그냥 구색을 맞출 뿐이다.
- 아이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면? 나는 그냥 금방 잊어,
그러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뭔가 해주면 더 기분 좋은 거지. 그러면 편하잖아.
- 그러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돈도 없지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돈을 들일 마음도 없다.
매일 후회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같은 후회를 되풀이 하지 않으면 되지.
라고 마음을 다잡지만
평생 끝날 것 같지 않은 후회의 말들이 지금도 마음속에 맴돈다.
아이고오~
과천집을 팔지 말았어야 했어
광장동에서 이사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