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태풍

곤파스

by 이연숙

그 날의 기억이 아직 선명한데

다시 그 태풍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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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지내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밀양역에 멈춘 기차가 출발한다 하면서도 꼼짝을 안한다.

실내등이 껌뻑거린다.

역 구내 전등과 전광판이 두어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암흑으로 변했다.

잠들었던 사람들 수상적은 낌새에 모두 잠을 깨고 KTX 실내는 순식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일렁거린다.

이러다 철로를 이탈해서 김밥처럼 구르면 어떻게 되나 겁이 났다.

그렇게 얼마쯤 서 있었을까.

차는 출발했고 밀양역에서 느꼈던 약간의 불안감은 부산역에 내리자 좀더 구체적인 공포로 바뀌었다.

부산역 일대는 암흑이었다.

신호등은 꺽이고 가로수는 뿌리채 뽑혀 나뒹굴고 있었으며

상가는 모두 불이 꺼지고 간판은 부서져 마치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어느 폐허가 된 뒷골목같았다.

겨우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왔을 때

요트경기장 바로 앞에 있던 주변 광경은 그야말로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였다.

아스팔트 위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돌덩이가 이리저리 구르고

새시가 부서졌다는 집, 화분이 날아갔다는 집, 1층이 물에 잠겼다는 리조트에

인근 지하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차는 이미 바닷물에 잠겨버린지 오래라는 얘기들이 무성했다.

사람들은 사라호 태풍을 기억해냈고 루사의 악몽을 떠올리며 그보다는 약하다했지만

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격는 매미가 제일 무섭고 힘이 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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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곤파스란다.

한 서너해 잠잠한가 했다가 한꺼번에 된 서리를 만난 느낌이다.

밤새 베란다 유리창을 뒤 흔드는 소리에 자다 깨다 일어나서 문 한번 다시 걸었다

그러다보니 아침이다.

베란다 창에 기대어 두었던 빨래 건조대가 넘어지는 소리에

유리창에 녹색테이프를 붙여야하나 잠깐 고민도 했다.

바람도 바람도 그런 바람 처음이다.

출근하던 남편이 전화를 했다.


"사진찍을거 많아~ 가로수가 부러져서 신호등이 휘어졌고, 건널목에는 엄청 큰 나무가 뿌리채 뽑혔어"

"..................."


'폼만찍사 남편 3년이면 보이는 것이 죄다 이야기거리'라는 말이 있던가?

없으면 이참에 하나 만들어줘야겠다.

초 중학교 등교시간도 늦추고 유치원은 휴원이라는 비상시국에

찍으란다고 사진기 들고 나갔다.

현관앞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나뭇잎으로 시작해서

거리는 매미때 그것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곳은 바다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 바닷물이 넘치는 상황이 없다는 것이 다를 뿐.

곤파스도 언젠가는 사라, 루사, 매미처럼 태풍의 역사가 되겠지.


"그 때 말도 마~. 굵은 가로수가 뿌리채 뽑히고

세워 놓았던 자전거가 죄다 나동그라지고 간판이 떨어지고 신호등도 부러졌잖아.

살다 살다 그런 난리 없었다니까?"


비가 멎었다.

바람소리도 잦아든 것같다.

오래 심술부리지 말고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주면 좋겠다.



2010.9.2. 네이버블로그 [사진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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