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5일차
여행에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뭔가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습성이 쉬이 버려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친구 J가 친한 친구 커플과 제주에 왔다고 했다.
친구에게 동행이 있으니 만나지는 못하는 대신 J가 전화를 했다.
“그래서 어제는 어디 갔다 왔어? 오늘은 어디 갈 거야?”
“어제는 이 근처를 산책했고 오늘은.... 근처 카페에서 글 쓰고 있어.”
“......”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냐는 무언의 질책을 안 들어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제주에서 5일 동안 그런 일상을 지내고 있다.
남은 3일도 아마 그럴 것 같다.
집에서 동네 산책을 할 때 생각지도 못했던 구석구석에 발자국을 찍었던 것처럼
이 곳에서도 포인트 어플이 열일 하고 있다.
미션 포인트 지점은 대부분 공원이나 카페 그리고 가끔 우체국일 때도 있다.
아직은 아니지만 우체국에 일부러 갈 일이 있을 수도 있겠고
관광 책자나 여행 소개 사이트에서 언급하지 않은 작은 공원(그 옆에 도서관이 있기도 한)
등에 발자국을 찍으며 걷다보니 어둡던 길눈이 밝아지는 기분이다.
오늘은 새섬 근처 소공원을 지나 기당 미술관 칠십리 시공원, 세계조가비 박물관을 거쳐
걸매 생태 공원에 들렀다. 샌드위치 가게를 향하던 길 중간에 서귀포시청 앞을 지났고
일요일 휴무라는 샌드위치 가게를 지나 문부 공원 옆에는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이 있었다.
기적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들어가 보기에 이미 지쳐서 다음을 기약했다.
이제까지 그저 단순한 이미지로만 기억하던 공간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화려하고 감동적인 절경만 있는 곳이 아니라
그 곳 역시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K의 친구 S가 했던 말이 실제 이해가 됐다.
재작년에 한 달 살이를 왔을 때 이런 곳에 집이 있다니 정말 부럽다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여행지는 그냥 여행으로 올 때가 가장 멋진 거라고 말했다.
그 때는 S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지 잘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제 저녁에는 K와 영상 통화를 했다.
휴일인데 혼자 지내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전에 식구가 많을 때는 한 번씩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사실상 지금은 어차피 집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일상은 똑같은데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하네?“
라고 말했다.
“그러게, 나도 출근 하는 날은 아침 먹고 단추 산책시키고 집에 와서 또 산책 시키고 저녁 먹고, 휴일에는 아침 먹고 산책, 점심 챙겨 먹고 조금 쉬다가 똥 뉘러 나갔다가 저녁.
결국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데 당신만 없는 게 좀 이상하긴 하네.“
라고 벼른 듯 술술 쏟아 낸다.
“맞아,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냥 사는 동안은 될수록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 같아.”
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번 호텔은 시행착오였어. 다음에는 조금 비용이 더 들더라도 불편한 요소를 피해야겠어.’
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똑 같은 건 아니다.
저녁 산책을 나가면 늘 바다를 볼 수 있고
주말에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공원 벤치 아무데나 앉아서 저녁놀을 볼 수 있는 건
이 곳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치킨을 먹다가 기분에 취해서 맥주를 한 캔 먹었다가 바로 다음날 화장실을 들락거리던 내가
이 곳에서는 적어도 사흘 동안은 매일 맥주 한 캔씩을 먹었는데도 까딱없었다는 것이 다르다.
무엇보다, 늘 함께 있으니 때때로 거기 있는 줄 의식하지 못했던 사람이
떨어져 있으니 그 자리가 엄청 크게 느껴진다는 점이 매우 다르다.
멀리 있어봐야 귀한 줄 안다는, 뻔한 진리가 괜한 말은 아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