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평생교육원에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20대 초반이었던가?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일본어 회화테이프로 독학을 한다고 하다가 일찌감치 포기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올 해 안에 일본 여행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명분으로 그걸 다시 시작한 것이다.
일어 공부가 만만치 않다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가 수업이 시작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한자 따로 문법 따로 가르치는 강사의 교습과정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벅차더라도 뭔가 깨달음이 있으면 괜찮은데 이건 뭐, 미미하나마 내가 알던 그 한자가 그 한자가 아니고, 장난스레 툭툭 던지던 만화나 영화의 대사를 흉내 내던 일본말들조차 새삼 낯설어졌다.
여행 중 통역은 엄마한테 맡길 거라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아이들의 엄포(?)에 긴장할 새도 없이 매 수업 전 후로 예습과 복습을 반복하는 와중에
어느 덧, 1월에서 5월까지 주 2회 수업을 무려 개근까지 했다.
한 주를 쉬고 새 학기가 시작 되던 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려는데 K가 덥석 가방을 먼저 챙겨 든다.
이게 뭔 일이고 싶어 멀뚱하니 바라보니
“학교 데려다 주려고.”
라며 씩 웃는다.
아! 낯설다.
(K로 말할 것 같으면, 남의 말 툭 자르기 선수에, 애초에 남의 말을 경청하는 타입이 아니며 장에 탈이 난 사람에게 곱창에 소주 한 잔 하러 가자는 사람, 즉
주어진 과제수행능력은 탁월하나 공감능력 제로에 창의력이 없음. 뭐 대충 이런 분 되시겠다.)
그럼에도 입꼬리가 눈치 없이 자꾸 올라가려고 움찔거린다.
원래 잘 하던 사람이 한 번 삐끗하면 잘했던 공조차 한 방에 날아가지만
원래 무심하려니 하던 사람이 어느 날 한 번 잘하면 서운했던 감정은 어디가고 잘해준 기억만 난다고 하던가.
그건 K1이 공공연하게 하는 말이었다.
아들 얼굴본지가 언제인지조차 가물가물한 건 예사고 통화 한 번 하려면 톡으로 편한 시간에 전화 하자고 해야 목소리 한 번 들을 수 있다.
몇 년 간 K1이 문학지 구독료를 내 주고 있었다.
구독 연장을 할 때가 되면 담당 직원에게서 전화가 오는데 올해는 없길레
구독료도 올랐으니 그만 중단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봄 호가 이미 오고도 남았을 어느 날, 구독 선물을 선택하라는 전화가 왔다.
연장 신청도 안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니
아드님이 연장했는데 그것도 3년 이라 선물을 세 배로 받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별로 즐거울 일 없는 우울한 날들이었는데
아드님의 문학지 3년 구독 선물이라는 말에 갑자기 기분이 산뜻해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톡으로 통화를 하자고 했고 전화가 왔을 때는
아유~ 뭘 그런 걸 다. 안 해도 괜찮은데... 등 이런 말 다 빼고 그냥 고맙다고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말이 먼저 나왔다.
“구독료도 올랐던데 뭘 3년이나 구독을 했어?”
“뭐 별로 해 드리는 것도 없으니 그런 소소한 거라도 하는 거지.”
‘짜아식! 말도 참 이쁘게 한다.’
감동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더 크게 오는 것 같다.
그런 일은 최근에 한 번 더 있었다.
작년에 화훼단지를 돌아다니면서 사들였던 허브 화분들이 무기력하게 시들어 간 이후
K에게 부탁을 했었다. 혹시 내년 봄에 내가 또 화분 산다고 하면 제발 좀 말려 달라고.
그래도 커피나무 하나는 봐 주라고.
3월에 파주에 다녀오는 길에 식물원에 들러 눈 딱 감고 커피나무 하나만 사가지고 왔다.
어쩌다보니 아침마다 그거 들여다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거의 한 달간은 이게 살려고 하는 건지 죽어가고 있는 건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러더니 군데군데 새 잎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신기하고 기특해서 안경까지 쓰고 매일 들여다보는데 어느 날엔가 잎 색보다는 조금 옅은
뾰족한 것들이 송이처럼 맺히기 시작했다.
하루 지나면 한 눈금씩 자라더니 급기야 하얗게 커피꽃이 피었다.
“이제 열매도 맺는 거야? 그러면 그거 볶아서 커피도 내릴 수 있겠네?”
나보다 K가 더 들떴다.
다음 날 아침에 내가 정말로 물감 붓을 들고 꽃술을 쓸어주고 있으니 K가 보고 웃었다.
적막만 가득하던 집 안에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럴 리 없는 줄 알면서도 어쩌면 빨간 커피열매가 맺혀 또 한 번 감동을 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