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 드디어 염원하던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성했다고 했다.
그에게 버킷리스트가 있었는지도 그 것이 패러글라이딩을 해보는 것인 줄도 몰랐었다.
하늘을 날아 보는 것이 꿈이 된 시점을 추측해 보자니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K가 연수차 미국에 가게 됐을 때 가족이 모두 일 년간 샌디에이고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글라이드 포트에 갔는데 까마득한 언덕 위에서 달려 바다 위를 나는 형형색색의 낙하산들을 보느라 길게 누운 통나무에 쪼르르 앉아 한동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때만 해도 그건 그냥 보는 거지 평범한 소시민이 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이 후로도 그 곳에 두 번인가 더 갔다.
한 번은 K가 비용을 물어봤다.
원화로 삼십 만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설마 K가 정말로 타려고 물어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때 그냥 타게 해 줄걸, 하는 생각이 십 년이나 지난 후에 들 줄 알았다면 빕을 굶더라도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태평양 위를 날게 해 줬으면 좋을 뻔했다.
태평양 대신 문경 하늘 위를 날았다고 했다.
여덞명이 가는 단체 여행 프로그램에 있었는데 일 등으로 참여의사를 밝힌, 모임 내 최고령자 K와는 달리 K 표현으로 ‘나이도 어린 것들’은 그거 무서워서 어떻게 타냐, 나는 허리가 아파서, 다리가 아파서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고 K 혼자 남았더란다.
추울까봐 옷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탈 수 있을지 긴가민가 하더니
다음 날 하늘 위에서 찍은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다.
썬글라스를 꼈음에도 세상 그렇게 환하게 웃는 표졍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렇게 말했다.
버킷리스트 하나 완성했다고.
뭐 좀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냐고, 축하한다고 말했다.
다른 리스트가 또 있냐고 물었다.
걸어서 국토종단을 해 보는 거라고 했다.
그 역사는 십 년보다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G시에 살 때 K가 걸어서 부산까지 갈 거라며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그 무렵 K는 역삼동에 있는 사무실까지 양재천 변을 걸어서 출근을 하느라
새벽 라디오 방송도 탔고 회사 사보에도 실렸으며 체중까지 줄이는 등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보병 출신이라서인지 걷기는 자신있을 뿐 아니라 좋아한다고도 했다.
거리와 공간에 대한 감각이 없어, 지금 대전쯤 갔으려나 하고 있는데 저녁 여섯 시가 넘었을 무렵 전화가 왔다.
“지금 오산인데 발에 물집이 잡혔어.”
오산이 어디더라? 머리로는 생각하며 입으로는
“그럼 그냥 집으로 와.”
라고 말했다.
발이 아프다니 더 걸을 수 없지 않겠나 싶어 무심히 했던 말인데
그 말이 구세주 같았던 모양이다.
K는 한시간 쯤 후에 초췌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걸어갔는데 차를 타니 한 시간 만에 오더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K가 언젠가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버킷리스트는 아니었나보다.
준비단계로 일단 제주 올레를 완주하겠다고 하고 이 년에 걸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산티아고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적절하게 타협한 것이 국토종단이었나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작년 이맘 때 제주에 살 때 느낌이 떠오르고는 했다.
실제로는 11월 말에서 12월 말까지 였지만 날씨의 느낌이 그랬다.
여행에 대해 설레지 않은지 좀 됐지만 어쩐지 작년 제주에서의 시간, 날씨, 온도, 습도가 드문드문 그리워졌다.
예전 같으면 최소 삼 개월 전부터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하지만 급하게라도 혹시 제주에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하기 싫은 말을 해야할 때, 예의 그 일그러진 표정으로 역시나 즉답을 피했다.
며칠 후 재차 물었을 때, 건강이 안 좋으신 부모님 때문에 오래 집을 비울 수는 없다고 했다.
한 달은 말고 일주일정도 다녀오면 어떨까 했더니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주 여행은 접히나 할 무렵, 보고 있던 미드에서 명대사(순전히 내 사심기준으로)가 나왔다.
암이 온 몸으로 전이돼서 바로 오늘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여성 환자가 예정했던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세우자고 하니 지금은 위험하니 다음에 가자고 말하는 남편에게
“언젠가만 꿈꾸다 오늘을 놓칠 수 있어.”
라고 말했고 몇 시간 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십일 월에는 유류할증료가 더 오른 다는 말에 시월 마지막 날 밤, 항공권과 호텔예약을 해 버렸다.
이렇듯 즉흥적으로 여행을 계획한 것은 물론 실행에 옮기기는 처음이다.
하여 지금 나는 제주도 새섬이 바라다 보이는 방에 있다.
드라마 대사이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상담 선생님도 같은 말을 했다.
“언젠가를 기다리다 오늘을 흘려 보내면 안 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