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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Dec 29. 2023

하나라도 하면 되지


내 친구 J가 연애하던 시절, 남자친구의 집에 처음 갔던 날 이었다.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 도중 방귀가 나오려는 느낌이 나서 힘을 주어 참았다. 참다보니 배가 점점 빵빵해져 살짝 뀌는 건 괜찮겠지 싶어 힘을 조금 뺐더니 한결 편해졌다. 다행히 소리도 그리 크지 않아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배가 더부룩해졌다. 참았다 뀌면 소리가 커질까봐 이 번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내 보냈다. 역시나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집에 가는 길에 바라다준다며 남친과 걷고 있을 때 물었다.


“아까 방귀소리 들렸어?”

“응? 앞에 거? 뒤에 거?”

“.......”


라고 하더라는 얘기를 J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동갑내기 였던 그 남자친구와 결혼을 해서 지금은 한 집에서 같이 나이들어가고 있다. 중소 기업에 다니던 남편은 IMF 시기에 건강이 나빠진 상태로 퇴직을 했고 집에서 아이 키우며 살림만 하던 J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생활전선으로 뛰어 들어야했다. 이 일 저 일 닥치는대로 거치다가 지금 직장에서 일 한지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나와 같은 소심좌 A형이면서도 나와는 달리 J의 성격은 매우 긍정적인데다 낙천적이었다.


몇 달 전 J의 사무실 근처에 갔을 때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 점심을 먹으며 본 것 말고는 수다를 제대로 떨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우리 이러다 누가 먼저 죽어도 모르겠다며 또 다른 숙이와 셋이 어느 토요일에 만났다. 수도권의 거의 정삼각형의 꼭지점 위치에 사느라 장소를 정하는 것이 늘 어려웠다. 하여 각자의 집에서 최소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강남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정했다. 와중에 굳이 식사 비용도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정한 이유는, 아는 사람은 다 알 듯, 밥먹고 차마시랴 디저트 먹으랴 옮겨 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먹다 놀다 원없이 수다를 떨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오래 못 만나기는 했나보다. 샐러드바 가격도 올랐는데 게다가 시간 제한까지 생겼다고 한다.


“아니 이게 무슨...”


혀를 끌끌 차며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보다 조금 연배가 있는 네다섯 명의 무리가 이쪽저쪽 기웃거리며 커피숍을 찾느라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놀이터 공원이 있을 거라며 옆에 있는 단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놀이터는 있으나 어디에도 앉을 곳은 없었다.


“야, 정말 강남인심 너무하네.”


늦가을 아줌마들의 배회는 어느 학교 마당 등나무 벤치를 찾아내고서야 멈췄다. 앉기는 앉았지만 어쩐지 내가 디디고 있는 발 만큼의 땅값을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J는 아직 먹을 게 많았는데 다 못 먹었다며 아쉬워했고, M은 그래도 이런 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혹여 누군가 좇아와서 나가라고 할까봐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사실상 학교 다닐 때에는 M은 다른 학교라서, J와 나는 같은 학교 였지만 각각 노는 물(?)이 달라서 그리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다. J에게 보이는 내 모습이 어땠는지는 물어본 적 없지만 내가 보는 J는 다 가진 아이였다.


“너는 재수없는 캐릭터였잖아. 예쁜데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고 게다가 놀기도 잘했잖아,”


J는 부정도 하지 않고 까르르 웃었다. 얘기는 맥락없이 흐르다가 남편 얘기와 집안일로 옮겨갔다. 남편이 마음은 착한데 꽝손이라 지금까지 주방을 비롯한 집안 일을 혼자 다 한다는 M

새벽 출근에 늦은 퇴근을 하는 이유도 있지만 J의 남편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주방도구를 새로 사서 생소한 요리를 만들어 먹어보라고 하는데 그 맛이 꽤나 좋더란다. 전남 구례가 고향인 J의 친정 엄마의 요리 솜씨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했다. J가 만든 음식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당연히 엄마를 닮았으니 딸도 요리를 잘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자기는 요리를 못한다고 했다. 요리 뿐 아니라 집을 꾸미거나 치우는 일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 당당한 모습에 어쩐지 내가 다 뿌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M이 물었다.


“남편이 뭐라고 안 해?”

“하나라도 하면 되지, 내가 하잖아. 그러더라.”

“어? 엉?”



그 말이 참 예쁘게 들렸다. 주방일에 손을 놓기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남편에게서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 없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남편의 눈치를 본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할 때나,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 냉장고가 텅 비었다고 말할 때, 점심 어떻게 할 거냐고 물을 때, 겁나게 눈치가 보인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주방 일을 둘 다 못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살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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