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사이 폭우가 올 수도 있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아침날씨는 조금 어두울 뿐 비는 오지 않았다.
며칠 전 K가 베이글 사러 가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동네 빵집도 아니고, 베이글을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정체시간대가 아니더라도 꼬박 삼십 분은 가야하는 그 집에 간다는 게 ‘뭐지?’싶기는 했다.
오늘 새벽에 가기로 하고 어제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네 시 반쯤 눈이 떠졌는데 다시 자자니 애매해서 그 때부터 말똥말똥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여섯시부터 문을 연다는 그 집은 지난 번에는 토요일이라서였는지 대기줄이 무척 길었다.
꼭 삼십 분이 걸려서 도착했는데 오늘은 가게앞이 휑해서 오히려 의아했다.
바로 주문과 계산을 마치고 오 분 정도 기다려 샌드위치까지 받아들고 집으로 오는데
차 안에 갓 나온 빵 냄새가 그윽하게 퍼졌다.
케냐 AA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와 베이글 샌드위치로 뉴요커처럼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K는 단추를 산책시키러 나갔고 나는 일본어 예습을 했다.
날씨는 다시 새벽보다 어두워졌다.
일기예보어플에는 비가온다는 말은 없는데 시커멓게 구름이 몰려온 하늘은 금방이라도 한 소나기 할 것처럼 잔뜩 찌푸렸다.
한 시간쯤 후에 단추가 돌아왔다.
재활용 쓰레기를 문앞에 내어놓느라 화장실 앞을 지나는데 쿰쿰한 냄새가 난다.
날이 흐려서 화장실 냄새가 나나보다 했다.
씻느라 욕실을 사용하고 나온 K는 별 말이 없다.
뭘 가지러 갔다오느라 끝방에서 나오는데 이번에는 현관에서부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기압이 낮은 날 가끔 그런적은 있지만 이정도였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욕실 바닥에 깔아놓은 발판 때문인가 싶어 K에게 청소 한 번 하면 좋겠다고 매우 정중하게 말했다.
아내가 하는 말에는 절대로 대답하지 말라는 조상님들의 가르침이라도 있었는지
이 분, 못 들은 건지, 언제 청소를 할지 생각하는 중인지, 지가하면 되지 왜 나한테 시키냐고 따질 단어를 찾는 중인지 또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냐고 따져묻기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은 최근에야 내렸다.
점심을 먹은 후 K는 출근을 했고 냄새가 점점 거실까지 침범하는 것 같아
화장실 환풍기를 켜 놓고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책을 보다가 아련하게 바라보는 단추의 눈길이 걸려 큰맘 먹고 오후 산책을 시켜주려고 모자를 쓰고 나섰다.
중문을 열고 신발을 신는데 냄새는 거기서도 났다.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일인가 싶었다.
리드줄을 꺼내려고 신발장 문을 열었을 때 냄새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냄새의 원인이 그 곳에 있었다.
리드줄에 매달린 똥주머니, 견주님이 뭐가 그리 급했는지 아침 산책 후 똥 버리는 걸 깜박하고 들어오신 모양이었다.
개똥냄새가 그렇게 지독한 줄 처음 알았다.
식세기를 사용하기 전, K가 설거지를 할 때 와장창 소리가 나면 뭔가 깨졌는데
그 게 참 신기하게도 다시 살 수 없는 그릇이거나 세트 중 하나거나 커플컵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욕실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지만 모른체 했다.
양치컵으로 쓰겠다고 머그컵을 세면기 위에 가져다 놓을 때부터 어째 불안하다 싶었다.
아마도 그 컵일거라 짐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단추 발을 씻기면서 보니 그게 없다.
코골이가 심해서 각자 방을 쓰지만 방 문 두 개 건너 잔잔하게 들리는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하거나 걱정이 된다.
저녁이면 아홉시가 될 때까지는 소파에 앉아서 졸며 자다 저녁 뉴스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자야겠다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아침이면 네 시에 깨서 잠이 안 오더라며 새벽부터 아침 준비를 하는 소리가
저건 반찬 그릇 여는 소리, 저건 누룽지 물 올리는 소리, 냉장고 문 여는 소리에 와다닥 와다닥 반찬그릇 다시 닫는 소리까지 방 안에 있어도 눈 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다.
식탁을 다 차리기 전에 일어나서 나오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고 하고
식사 준비가 다 끝난 다음에 나오면 밤에 뭐하고 늦잠을 자느냐고 뭐라 한다.
함께 TV를 볼 때면 꼴보기 싫은 진행자가 말을 할 때마다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정치 뉴스를 보면서 울화통이 터지는 것 같으면 같이 맞장구도 쳐 준다.
K는 참 많은 소리를 낸다.
때로는 소리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울 때도 있고 한 소리만 집중 돼서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을 때도 있다. 그 소리들에 힘이 빠진 느낌이 들 때면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막상 소리를 내야할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다 한 번씩 소리들이 사라졌을 때를 상상하면 숨이 막힐 것 같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아랫집에는 미안하지만 쿵쿵거리는 K의 발소리도 좋고
집에 들어오면 반갑다고 매달리는 단추에게
“내가 그렇게 좋아? 매일 보는데 뭐가 그렇게 좋아?”
라는 매일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되풀이하는 그의 말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K선생과 있으면 심심할 새가 없다.
가끔 한 번은 심심하고 싶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