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숙 Nov 14. 2024

 너무 오래 놀았나봐

2주 쯤 글을 쓰지 않으면 브런치팀에서 메시지가 온다.

글쓰기는 근육과 같으니 매일 한 문장이라도 써서 근육을 기르라고.

4주 쯤 되니 독자들은 꾸준히 쓰는 작가에게 친밀감을 느낀다며 새 글 알림을 보내보라고 한다.


어쩌다보니 그 후로도 글 한 줄 쓰지 않은 채 또 2주가 지났다.

브런치팀에서도 포기했는지 오늘은 아직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고 있다.

글을 뭐, 누가 쓰라한다고 쓰고 쓰지 말라고 한다고 안 쓸 것도 아니면서도

글 안 쓰냐는 재촉이 한 편으로는 뭐 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다 자리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한다.

물론 그 사이에 아들 결혼식도 있었고 런던에 여행도 다녀왔다.

그렇다고 내 몸이 바쁠 일은 하나도 없었으면서 마음만 분주하고 바쁜 시간을 보낸 건 사실이다.

하여 어제는 모처럼 글 쓸 결심을 하고는 노트북 챙겨서 스타벅스에 갔다.

메시지 내용처럼 정말로 글 쓰는 근육이 폭삭 녹아버리기라도 한 건지

쓰려던 글은 안 쓰고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괜히 화장실 한 번 다녀오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다보니 한 시간이 흘러있었다.

K의 한 시 삼십분 출근에 맞춰 점심도 먹어야하니 사실상 할애된 시간은 고작 세 시간 남짓이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며 마음을 다잡고 한글을 열...

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생뚱맞게 로그인을 하란다.

아이디는 이메일 주소라니 몇 개만 넣어보면 되겠지만 패스워드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가지고 있는 이메일 주소를 뺑뺑 돌려봐도 일치하는 정보가 없다는 메시지만 돌아온다.

아이디를 모르니 비밀번호는 말 할 필요도 없다.

한참을 끙끙거리다 메신저로 로그인을 해서 한글이 열리기는 했는데 전에는 보지 못했던 ‘읽기 전용’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붙잡고 씨름을 하는 동안 또 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반짝 떴다 사라지는 팝업창에서 ‘편집기능을 이용하려면 구독...어쩌구 하는 글을 본 것 같았다.

‘구독한지 얼마 됐다고 또 구독을 하래?’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가계부 어플을 뒤져보니

어머나, 그게 벌써 작년 11월이었다.

제주도에 갔을 때였다.

그 때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잘 쓰던 한글어플이 열리지 않았다.

혼자 해보다 안 돼서 K2에게 도움을 청했고, 아마도 구독요금제로 바뀐 모양이라고 해서

못마땅한 기분으로 구시렁거리며 일 년치 구독료를 결제했었다.

요금 결제를 하고나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술술 진행이 됐다.

(그래봐야 한글 시트 열고 글을 쓸 수 있게 됐다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한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어느 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고 시간약속 칼같은 K가 앞자리에 와서 앉았다.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마음 단디 먹고 일본어 책 가방에 노트북을 챙겨 넣었다.

수업 끝나고 K와 점심을 먹은 후 카페에 가서 어제 쓰려다 만 글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영국 여행중에 새로 산 백팩을 들어 올리자 (거짓말 조금 보태서) 허리가 휘청했다.

한국 C몰에서 몇 년 전에 샀던 그 것이 생각보다 허접해서 짝퉁일지 모른다며

런던에서 굳이 비싼 버스 갈아타가며 직영매장에 가서 현금으로 거액(?)을 투척하고 산 것이다.

백팩이면서도 탄탄한 손잡이가 달린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거 말고는 소재도 구조도 메는 끈의 디테일 모두 20년 된 키플링보다 못하다.

가방이 안 좋은 거하고 무게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면 딱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아무튼 너무 무거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노트북 대신 아이패드를 넣고 나왔다.

무게는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누군가 뒤에서 내 등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으로

어쨌든 지금은 스타벅스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뭐 그리 대단한 글을 쓴다고 이러나 싶지만

이렇게라도 붙잡고 싶은 유일한 일이 글쓰기다.

너무 오래 놀았나보다.

돌아올 집이 있어 여행을 떠나듯,

글쓰기가 내게는 오래 놀다가도 돌아갈 수 있는

집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 엄마는 기운이 나면 안 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