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은 이제 안 한다면서도 절인배추 30킬로그램을 주문해 김치를 담갔다.
주는 사람 수고를 덜어준다는 마음으로 커피마시려냐는 말에 ‘응! 반 잔만.’ 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김장이란게 안 하면 모를까, 한다면 세 포기나 삼십 킬로그램이나 결국 준비해야하는 것은 똑같다.
김장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옆으로 샜다.
요즘은 휴대폰이 있어서 다이어리는 더 이상 필요 없다면서도
해마다 요맘 때쯤 스타벅스 플래너를 받기 위해 아메리카노 한 잔 더 마시고, 캘린더 준다는 말에 아직 원두가 남았는데도 원두 주문을 서두른다.
한 번 직원은 영원한 직원이라는 양 K가 몸 담았던 회사에서 큰 것과 작은 것 야무진 세트로 구성된 다이어리도 어김없이 도착했다. 그러고도 아마 인터넷서점에서 탁상용 캘린더나 다이어리를 준다고 하면 책주문을 할 것이 뻔하고 성당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반장님이 가져다 둔 달력은 냉큼 가지고 들어와 벽에 걸었다.
아직 한 줄도 적은 것이 없는 3년 전 다이어리를 볼 때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새 다이어리가 생기는 건 여전히 설레고 기분이 좋다.
결국 한 해가 다 갔다는 말인데 그게 기분 좋은 내가 좀 특이하긴 한 것 같다.
터질 것처럼 꽉 찬 책꽂이에 또 새로운 다이어리를 꽂아 놓고도 일정 메모는 휴대폰에 한다.
그나마 요즘 들어서는 병원 예약이나 일본어 수업 가는 것 말고는 딱히 기록할 일정도 별로 없다.
지난 주말에는 무심코 휴대폰을 보다가 배경화면에 있는 캘린더에 월요일 일정이 무려 세 개나 있는게 눈에 띄었다. 보통은 월 목요일에 있는 일본어 수업과 3주에 한 번 월요일에 있는 병원 예약이 겹치고는 하는데 이 번에는 세 개라 그게 뭘까 싶어 일정을 눌러봤다.
영화 예매가 되어있었다. 지난 밤 잠자리에 누웠을 때 영화관 상영 리스트를 보다가 아트하우스에서 20주면 기획전을 하는 영화 중 하나를 예약했던 것이었다.
K의 근무 시간을 고려한 시간대 영화를 예매하고는 수업 끝나고 병원 갔다가 점심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마시고 K는 일터로 나는 영화보러 가는 매우 합리적인(?) 일정이라 감탄까지 했었다.
월요일 아침, 춥지 않을만큼의 바람이 불어 상큼한 걸음으로 교육원에 갔다. 강사는 시간 꼭 맞춰 수업을 끝내주었고 병원으로 가는 마을버스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었다.
대기자가 많았는데도 늦지 않고 진료를 받았고 미리 와서 기다리던 K와 자주 가는 라멘집에서 돈부리로 점심을 먹었다. 텀블러 쿠폰으로 고급진 커피까지 텀블러에 받아 느긋하게 커피도 마셨다. K가 출근시간이 되어 나도 같이 일어섰다. 교차로에서 K의 방향 신호등이 먼저 켜졌다. 그가 박력있게 손을 흔들며 예의 다부진 걸음걸이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곧 이어 내 방향 신호가 켜졌다. 아침에 입고 나온 경량패딩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만큼 한 낮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지금은 헌도시가 된 신도시로 이사를 오는 것보다 공원길을 따라 이 곳으로 걸어오는 과정도 꽤 괜찮다 싶었다. 우리집이 있는 서쪽으로만 가면 되니까 신호가 흐르는대로 걸었다. 공원은 이미 물들었던 나뭇잎이 떨어져 바닥에 수북하다. 그러고보니 이 곳으로 이사를 온 후 벌써 세 번째 가을을 지나고 있었다. 몇 개의 블록을 가로질러 길게 이어진 공원길은 언제 걸어도 한산해서 좋다. 공원길에서 천변으로 내려왔다. 지류와 넓은 천이 만나는 곳에서 천변을 따라 걷다가 막 다리위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캘린더가 떠올랐다.
‘일정이... 세 개가 있었는데. 세 번째가 뭐였더라?’
느긋하게 폰을 꺼내 캘린더를 열였다.
오! 마이 갓!
영화 13:05
황급히 시계를 보니 13사 48분
아 놔...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볼새라 서둘러 일정을 지웠다.
그나마 무료쿠폰이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잠 못 잘뻔 했다.
어쩐지, 오늘 뭐가 술술 풀린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