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치 않은 말인데도 어쩐지 쾌감이 느껴져서 흠칫했다.
개성있는 외모와 독특한 연기가 매력인 여배우가 결혼을 했다고 했다.
토크 프로그램에서 자기도 결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면서도
열 살 연하의 남편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집안 일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진행자가, 제일 잘하는 음식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예의 상냥한 표정으로 방긋 웃으며
“저는 요리를 안 하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녀다운 대답이다 싶으면서도 그 말이 어쩐지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굳이 왜냐고 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이 나라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면 집안일을 해야하고 요리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요소였다.
미인 소박은 있어도 솜씨좋은 아내 소박은 없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고
결혼하기 전에는 신부수업으로 요리학원에 다니는 게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어른들은 누구집 새며느리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며 숙덕거리는 일도 있었고
실제로 신혼초에는 시고모님과 사촌 큰동서가 새 조카며느리 음식 솜씨를 본다며 갑자기 집에 온 적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의 조기교육(?) 덕분으로 나는 얼결에 요리 잘하는 며느리가 되어있었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장봐다 식구들 저녁준비를 하면서 자랐는데도 성인이 되었을 때는 ‘집안 일도 연습을 해야지, 시집가서 갑자기 하려면 다 친정 욕먹이는 거야.’ 라며 모의 실전까지 철저하게 준비시켰다.
여자 아이에 대한 신부수업 조기교육은 내 세대에서 끝나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않았다.
K2와 시댁에 갈 때마다 시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를 예쁘다 귀하다는 표현대신
“저게 시집을 가서 밥이나 해 먹고 살려나 모르겠다.”
라며 공감할 수 없는 덕담(?)을 하시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K2는 결혼을 하면서 남편과 집안 일을 나눴는데 주방일을 뺀 나머지 일을 맡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딸 집에 갈 때마다 사위가 주방일을 하는 모습이 민망해서 좌불안석했었다. 그렇다고 딸을 나무라면서 주방에 세우고 싶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나 또한 딸 집 주방에서 과로사하는 친정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옛날사람이다보니 마음까지 편해질 수는 없었다.
굳이 새벽밥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직장에 다녔으면서도
K를 위해 삼십 년동안 새벽밥을 했었다. 그 것에 대한 K의 보답(?)으로 퇴직을 한 이후부터는 남편이 차려준 아침식사를 하게 됐다.
(매일 새벽 가스불에 밥짓고 재료 다듬어 국끓여서 차렸던 아침상보다는 많이 심플하지만)
그런데 또 사람이 편한 맛을 보니 점점 바라는게 많아지는게 인지상정이라
점심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하자고 했었던 것 같은데 늘 배는 K가 먼저 고파졌고
나는 책상에 한 번 자리잡고 앉으면 불이 나지 않는 한 틀어박히는 편이다보니
점심식사도 K가 준비하는 일이 많아졌다.
K가 저녁준비까지는 절대 개입하지 않지만 그 역시 대부분 간편식을 이용하느라 어느 시점부터인가는 내가 주방에서 많이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사위는 처음부터 요리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가끔 K2가 어느 유명한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이 맛있었다며 제 남편에게 ‘저거 만들어줄거지?’ 했을 때 나는 속으로 ‘그게 되겠어?’ 했었다.
그런데 그게 됐다.
생크림 레몬소스를 곁들인 연어스테이크가 만들어졌고 오래 졸여 만든 라구소스 파스타도 맛이 완벽했다. 언젠가 한 번은 코울슬로를 많이 만들었다며 한 통을 가져오기도 했다. 새삼 사위가 다르게 보였다.
그걸 나도 따라해봤다.
요리가 아니고 남편에게 주문을.
“코울슬로 맛있던데 그거 해주세요.” (나름 매우 애교 있고 공손한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마음속으로는 가느다랗게 ‘그게 되겠어?’라고 생각했으나
사위에 이어 K역시 그 어려운 걸 해 냈다.
뿐만 아니라 들기름 막국수로 시작해서 마파두부, 단호박죽, 진미채, 두부조림, 우엉조림 등 그가 만들어 내는 메뉴의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심지어 맛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급기야 지난 주말에는 평범한 멸치국수 위에 달걀지단 고명까지 얹었다.
기분 좋으면 한 번이나 할까 사실상 나도 고명은 대충 생략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놀라움에 이은 감동에 코끝이 다 시큰했다.
예전의 나는 요리를 안 할 수가 없으니 못할 수도 없었다.
여자가 요리를 못한다는 것은 칠거지악에 버금가는 허물이라고 하니 설령 못한다고 해도
자기 입으로 요리를 안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여배우의 말에 힘입어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요리를 안 하잖아요.”
그 말이 이렇게 기분 좋아질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