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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무도 잊어버렸네

by 이연숙


처음 이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최고의 단점은 대중교통이용이 불편하다는 것이고 장점은 단지 옆으로 안양천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했었다.

물 가까이 사는게 좋다는 사주는 그렇다치고 천변길은 신호등이 없어서 좋다.

걷기에도 자전거를 타기에도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고 생각했었다.

만 사 년차로 접어드는 지금, 걷는 반경이 점점 넓어지다보니 걸어서 이십 분 혹은 이십오 분쯤 걸리는 전철역이 무려 두 개 라인이나 있어 우리끼리는 나름 더블역세권이라고 부른다.

단점이었던 교통편은 그런데, 장점이었던 천변환경은 언제쯤 부터인가 단절하고 지냈다.

처음에는 날마다 그 길을 걸었다.

그 무렵에는 관리가 거의 되지 않은 듯 잡풀만 무성했었다.

저녁때가 되면 날파리도 많고 모기도 많았다.

그다지 쾌적한 환경이 아님에도 자전거도로와 보행로를 표시하는 선이 무색할만큼 그 곳에는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때로는 정체까지 생기고는 했다.

걸으면서 물고기 구경도 하고 왜가리 사진도 찍었다.

삼 년전 갑작스런 폭우로 밤사이 천이 범람한 후에는 속절없이 찢겨나간 굵직한 나무들을 보며 안타까웠고 다리 난간이 흔적도 없어진 것을 보고는 아찔하기도 했다.

튼튼하게 생긴 나무가 뿌리를 드러내고 누운 옆에 엉성하고 초라한 나무가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신통해서 너 내 나무 하자, 며 이름까지 붙여 줬었다.

천변은 해마다 조금씩 정갈해지더니 작년에는 일정구간 넓게 심어놓은 과꽃이 장관이었다.

그럼에도 그 길대신 횡단보도를 세 번이나 건너 삼십 년 된 신도시(?)의 공원까지 가게 된 데에는 계기가 있었다.

옆단지 상가에 다녀오는 길에 정문 화단 옆 바닥에 어떤 길쭉한 생명체가 몸을 틀고 있는 것을 봤다.

그 곳은 아파트 입구 상가가 모여있는 곳이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얼핏 곁눈으로 보고 지나쳐 오는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새끼뱀일 수밖에 없었다.

뱀이라기에 체구는 많이 작았지만 지렁이라기에는 움직임이 무척 활발했고 미꾸라지라기에는 컸다.

뱀일 수밖에 없지만 뱀이 아니기를 바라며 시간이 가면서 잊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고 이번에는 저녁을 먹고 천변 산책을 하는데 한 쪽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몇몇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를 비켜가면서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눈길이 갔는데 그만 뭔가 험한 것(?)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어두워서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곳은 그 생명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K는 그 것이 오소리거나 너구리일거라고 했다. 그것들은 야생본능이 있어서 가까이 가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무렵 K는 아파트 입구에서 가까운 천변에서 정말로 뱀을 봤다고 했다.

아, 이것은 동물이 살 수 있을 정도로 환경이 좋아졌다고 해야할지 그 들이 오갈데가 없어질 정도로 환경이 너무 나빠진건지 아무튼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멧돼지 고라니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그게 하필 뱀이라는 말에 나는 이후로 천변산책을 그만두었다.

그게 벌써 삼 년전의 일이다.


20250226내 나무도 잊어버렸네.jpg


지난 주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안양천으로 오후 산책을 나갔다.

아직은 피부에 닿는 공기가 꽤나 차가웠지만 햇살은 더할 수 없이 화창했다.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안 가던 사이 왜가리, 청둥오리 등 개체 수가 무척 많이 늘었고 사람이 지나다니는 근처에서 잉어가 떼로 입을 뻐끔거린다.

문득 이름을 붙여줬던 나무생각이 났다.

수려하게 잘생긴 것이 아니라 왜소하고 못생긴 나무였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그 쯤일거라 생각되는 지점에 갔으나 그 나무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 사이 몸집이 굵어진건지, 가지가 부러져 못알아 보는 건지 아니면 수변 정리 공사를 하면서 통째로 잘려나간건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 이름까지 붙여놓고 내 나무도 잊어버렸네.’


당황스러우면서도 다른 한 편 반갑기도 했다.

큰아이 어릴 때 큰집 조카와 다르게 대하는 시어머니가 서운했다는 얘기를 하자 형님은


“동서! 안 좋은 기억은 그냥 좀 잊어버려. 그게 벌써 언제적 얘기야.”


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긴 억울하고 서운한 기억들을 끌어안고 있어봤자 나만 서럽지.

보자보자, 좋은 기억들이 뭐가 있더라?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순수한 영혼을 가진 소아과 의사 애리조나 로빈스 선생은

아들을 잃은 부자부모의 항변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했던 주문을 말하며

아이영혼을 위로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수리수리 마수리, 좋은 기억은 내게 오고 나쁜 기억들은 멀리 가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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