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금 덜 아껴주고 적당히 걱정해도 괜찮은데

by 이연숙


데이트 하던 시절, K는 그 당시 네 살이었던 조카 얘기를 자주 했다.

첫 손주이자 첫 조카였으니 땅에 내려 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이라고 했다.

집에 인사를 갔을 때 방 세 개 중 하나는 아이의 장난감으로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아이 역시 엄마 아빠로부터 좋은 유전자만 물려받았는지 귀여운데 영리하기까지 했다.

하루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엉덩이를 토닥이다가 점점 세기를 크게 하며 말로는


“아이 예쁘다, 아이 예쁘다.”


고 했더니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아프다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표정이 귀엽더라고 했다.

참 나쁜 어른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벌써 삼십 년이 훨씬 지난 얘기인데 나는 아직도 직접 보지도 못한 그 장면이 내 경험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괜히 화가 날 때가 있다. 다행히 그 아이는 잘 자라서 좋은 어른이 되었다.

어느 시절에는 매를 때리면서도 사랑의 매라고 하고

자존감을 뭉개는 말을 해 놓고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할 때가 있었다.

사랑한다면 아프게 할 수 없을 테고

잘 되라고 하는 말이었다면 잘 돼야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야할텐데 그런 마음이 든 적은 없다..


20250218조금 덜 아껴주고 적당히 걱정해도 괜찮은데.jpg


오후 짧은 산책길에 나섰다.

며칠 간 봄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만큼 포근했는데 오늘은 얼굴에 닿는 공기가 꽤 차갑다.

코스를 짧게 해서 아파트 단지를 밖으로 크게 한 바퀴 도는 걸로 하기로 했다.

단지 서쪽으로는 왕복 이 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철길이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수까지 서 있어서 보도는 둘이 나란히 서서 걷기에는 협소한 편이다.

안 그래도 하기 싫은 일본어수업에서 강사의 차별적인 태도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는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K가 내 몸을 길 옆으로 확 밀어젖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무슨 큰 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벨을 울리며 느리게 우리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황당한 오버액션이었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자전거 벨소리를 못 들었구나?”

“들었거든?”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그는 ‘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라든가,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고 묻지 않았다.

마치 어디 급한 볼일이라도 보러 가는 것처럼 입은 꾹 다문채 제 갈길만 갔다.

슬슬 골이 나기 시작했다.


“괜히 같이 나가자고 했네. 어차피 혼자 걸으나 같이 걸으나 제각각 걷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야.”

“......”

“아니 뭐 그렇게 오버를 해? 벨소리 나도 들었고 말로 비켜서자고 하면 되지 그렇게 밀치나?

그리고, 못들었다고 한들 자전거가 서든 피해가든 하겠지. 자전거에 치여 죽나? 그건 보호받는 느낌이 아니라 보여주기 같았어.”


아직 반바퀴가 남았는데 서둘러 길을 꺾으며


“기분 나빠서 더 못 걷겠다. 집에 갈래.”


했더니


“나도 기분 별로야. 어떻게 그렇게 말하냐?”


한다.

이후로 아직 냉전중이다.


생각해보니 엉덩이를 펑펑 맞으면서도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어린 조카가 떠오르는 것은

늘 이런 상황일 때였다.

걱정이 돼서, 아껴서 하는 행동들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그 것이 다소 과격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남프랑스 여행은 여행동호회 사람들과 함께였다.

사실상 점을 찍듯 들렀어도 그 때 갔던 장소들은 지금도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은 이유는 남편과 일행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불편해서 였다.

친하지는 않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아닌 동호회 사람들은, 부부라고 꼭 붙어 다녀야 되냐, 같은 류의 뼈 있는 농담을 툭툭 던졌고 그럴수록 K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내 팔을 끌어 당겨 이리저리 세워놓고 사진을 찍기 바빴다. 때로 그 당기는 힘이 너무 세서 내가 휘둘리는 느낌이 들때는 다 때려 치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어. 일행들에게 오기를 부리는 거였어.’

라는 생각은 여행이 끝나고 한참 후에야 들었다.


K는 좋은 사람이다.

묻는 말에 대답을 잘 하지 않고, 중간에 말을 툭툭 끊고,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오 분이 지나기 전에 갑자기 목이 마르거나, 화장실이 급해지거나 단추가 평소 하던 짓이 새삼 웃기거나해서 그럴때마다 나는 화가나지만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그 좋은 사람이

지금보다 조금 덜 아껴주고 적당히 걱정해줘도 괜찮을텐데..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쩌겠어, 게으름도 실력인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