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가야겠다고 말했을 때 K의 표정이 순간 복잡해보였다.
갑자기?
왜?
그럼 나는?
말린다고 안 갈 것도 아니고... 등등 생각이 아우성치는 모양이다.
몇 해전 늦은 가을에 한달살이를 하고 온 후 기억이 좋아서 이듬해 다시 가자고 했었다.
그 해는 연초에 시어머니가 고관절을 다쳐 입원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전같지 않게 회복도 느렸고 약간의 섬망 증세도 보여 가족등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길고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한 달 쯤 후에는 무사히 퇴원도 했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회복속도가 병원에서보다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 무렵 K는 시니어스쿨에 다니고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 중 몇몇 역시 연로하신 부모님이 있어 언제 무슨일이 생길지 몰라 오분 대기조로 살고 있다고 했단다.
제주 한달살이는 그래서 갈 수 없다고 했다.
고성이나 동해 삼척 쯤 육로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가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결국 그 해 한달살이는 가지 못했다.
K는 제주도는 비행기를 타야하니 급하게 와야할 때 번거롭다고 했지만
나는 비행기를 타야해서 제주도가 좋다.
“고성도 좋고 경주도 강화도 좋아하지만 나는 그래도 제주가 좋아. 왠지 알아?”
“비행기를 타니까?”
“맞아, 혼자서 미국에도 가고싶고 일본도 갈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좀처럼 용기가 안 나.
그런데 제주도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면서도 겁이 나지는 않는 것 같아.
내가 살던 일상과 단절 된 것 같으면서도 익숙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
공항까지 태워주겠다는 그를 공항버스 터미널에 남겨두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왔다.
일본어수업은 시원하게 결석을 하고도 어제 온라인 영어수업은 무려 여행중에도 참가했다.
그게 꼭 온라인과 오프라인수업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두드러진 발전은 없으면서도 그냥 영어로 수다를 떠는 시간이 좋을 뿐이다.
줌화면이 열리자 강사는 블러처리된 내 배경화면을 보고도 제주에 온 줄 한 눈에 알아봤다.
여행 예산이 얼마쯤 되냐고 물었고 특별한 계획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부띠끄 호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했을 뿐 여전히 가성비 좋은 숙소를 이잡듯 뒤졌고 저가항공으로 왕복 칠만원 정도 들었다고 했으며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혼자 여행을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제주도든 자기 고향인 샌디에이고든 모두 가족과 함께 할 거라고 했다.
그건 아마도 개인적인 성향 차이일 거라고 덧붙였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도 너처럼 아이들이 어릴 때는 여행 거의 못갔어, 더구나 혼자 여행은 꿈도 못꿨지.”
라고 말했다.
강사도 질 수 없다는 듯
“맞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중에라도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나혼자 일주일? 어휴 상상이 안 돼. 게다가 아내가 나와 아이들만 두고 혼자 간다고? 아니 아니,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 양반 가만 보니 꼰대도 보통 꼰대가 아닌 것 같다.
코리안 장모님이 절대로 남자는 주방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해서 자기는 집안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할 줄 아는 요리가 있을리 없다. 어떤 때는 이 무늬만 미국인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때도 있다.
제주에 가서 뭘하면서 보냈냐고 또 물었다.
떠나기 전하고 똑 같다고 했다.
집에서는 온종일 집에 머물고 여기서는 온종일 호텔방에 머무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했다.
별건 아니지만, 이 곳은 창 밖에 바로 바다가 있고 창문을 열면 파도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공항버스 터미널에서 K가, 도착해서 저녁은 꼭 식당에 가서 먹으라며 만원짜리 몇 장을 줬다.
수학여행가는 딸에게 간식사먹으라며 용돈주는 아빠같았다.
호텔방에 짐 들여놓고 그 식당에 가서 막 자리에 앉았는데 그가 전화를 했다.
이건 무슨 물가에 내 놓은 애 걱정 하듯 한다.
별 사족없이 뚝뚝 끊어지듯 대화를 하다 통화를 끝낼 무렵 그가 말했다.
“전화 하지 말까?”
망설임도 없이 ‘응’이라고 말했다.
뻔뻔해지려고 한다. 염치없어도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걱정되고 문득 불안할 때도 있지만 냉정해지려고 한다.
뭘 해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혼자만의 공간
그 곳이 내게는 제주일 뿐이다.
제주에, 어떤 곳도 대안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