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K와 함께 하는 여행은

일본 : 오사카, 큐슈

by 이연숙



오래 전에 여행동호회와 함께 돌로미테를 포함한 발칸반도 주변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인솔자인 동호회장 말고도 그 지역 전문가인 여행작가가 동행함으로써 한결 풍부했던 여행이었다. 이미 출간된 여행서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여행 고수를 지나 달인의 경지에 닿은 듯했다. (고수가 높은지 달인이 높은건지? 뭐 아무튼)

창 밖으로 올리브 나무가 끝도 없이 펼쳐질 때, 보라색 라벤더가 숨막히게 이어질 때 그는 각각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바꿔 틀어줄 때 가슴은 콩닥거리고 눈가는 촉촉해지며 기분은 마시멜로에 빠진 것처럼 달달하고 몽글몽글해졌다.

버스에서 우연히 작가님과 가까이 앉았을 때, 멤버들 화장실 가느라 잠시 휴게소에 쉬고 있을 때, 그리고 아침에 호텔에서 사람들이 모이기 기다리고 있을 때였나?

그렇게 세 번 쯤 그가 내게 말했다.


“여행을 제일 잘 하시는 것 같아요.”

“......?”


처음에는 나한테 하는 말인 줄 몰라서 그냥 있었고 두 번째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 쳐다보기만 했었다. 세 번 째에는


“여행을 잘 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대답을 듣고 까먹은 건지 아예 듣지 못한 건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게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른다.

그 때 처음 봤으니 ‘자주’의 의미는 아닐 테고, 안 그래도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보릿자루가 되기 일쑤이지만 특히 그 모임은 그 무렵 이미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제 가입한지 일 년이나 됐을까 싶은 내가 무리에서 겉돌고 있는 모양이 많이 티나서 그걸 말하는 것이었을까 생각도 해봤으나 여전히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 뿐이다.

혹여 겉도는 모양이 타고난 소심증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처럼 보여서라면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행하다 길 위에서 죽는게 소원이라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사실상 제주도 말고는 혼자서 떠나본 여행은 없다. 제주도를 혼자 갈 수 있으면 일본도 충분히 혼자 갈 수 있다는 일본어 반 동지(?)들의 응원과 격려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월에 결혼기념일 여행으로 제주도에 가자고 했다가 일본에 가보자고 했다.

사월은 성수기라 사람도 많고 항공료며 숙박비 모두 비쌀 테니 한 달 당기자고 한 것이 두 달 전이었고 급기야 기념일을 꼭 한 달 남긴 날에 오사카행 비행기를 탔다.

애초에 결혼기념일 여행으로 시작했으니 당연히 K와 함께였다.

항공권은 내가, 숙소는 K 친구회사의 호텔을 추천 받았다.

그리고 K도 나도 두 달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어쩐일인지 여행의 설렘도 두려움도 생기지 않았다. 일본어 공부를 삼 년이나 했지만 입도 못 떼는 나와는 달리 K에게는 한자를 읽을 수 있다는 근거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첫 날 저녁, 걷기 어플에 기록된 삼만 걸음을 보고 ‘아! 내가 K와 여행을 왔구나.’ 했다.

팔 년 전 파리에 갔을 때, 파리가 처음이었던 K는 구글지도를 잘 읽지 못해서 에펠탑에서 개선문으로 개선문에서 다시 에펠탑으로 등등 반나절 동안 무려 이만 걸음을 걸었더랬다.

오래 걸어도 편하다는 에어신발을 신었음에도 양쪽 새끼발가락에 꽈리만하게 물집이 부풀어 있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다.


숙소는 오사카 중심가에서 외곽 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다.

그러므로 에펠탑에서 개선문이었던 것이 이번에는 남바에서 도톤보리로 바뀌었을 뿐 K는 다시 힘차게 걸었다.

그러니까, K와 함께 하는 여행은 묻지마행군이다.

더러는 손을 잡아줄 때도 있었지만 지도를 보며 모르는 곳을 찾아갈 때면 두세 걸음 앞서가다가 점점 가속도가 붙어 마치 자기 혼자 있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멀어질 때도 있다.

그 날은 결국 사고가 나고야 말았다.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오래전 마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곳을 찾아 걷고 걷고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고 횡단보도를 수 차례 건넜다.

평소 잘 입지 않는 원피스를 여행한다고 차려 입었다. 가방은 크로스로 메고 오른 손에는 카메라를 들었다. 횡단보도에 녹색 신호가 켜지자 K는 순식간에 저쪽 길 끝에 가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아스팔트 바닥에 홈이 패인 것이 눈에 띄었고 동시에 와치에서 운동알림이 울렸다. 카메라를 쥔 손으로 알림을 끄며 K를 힐끔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지, 내 옆에 걸어가던 수트를 입은 두 청년이 어쩔 줄 몰라하며

다이죠브?를 연발했고 두 박자쯤 늦게 K가 가던길을 되돌아왔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오른 손목이 아스팔트에 제대로 갈려 피가 송송 솟고 있었다.

무릎도 정상은 아닌 것 같고 어깨도 아픈데 창피함도 화도 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난 후 오른 쪽 배가 아픈 것 같아 거울을 보니 엉뚱하게도 골반위 근육이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어있다.


20260330 그러니까, K와 함께 하는 여행은.jpg


집으로 돌아와 어제 저녁에야 K에게 화풀이를 했다.


“여행을 같이 한다는 건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거지 뭐 바쁜일이 있다고 혼자 가나?”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내 다~~~시는 남편하고 여행을 가나봐라.’


그런데 어째 이런 결심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문득 나의 어떤 모습이 여행을 잘 하는 사람처럼 보였는지 궁금해졌다,

다음에는 K의 방식 말고 내 방식대로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매거진의 이전글이건 그냥 내생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