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섯 살 엄마의 방구석 세상

가족, 문득 그립고 때로 서러운 이름

by 이연숙


“어떤 날은 육십 개 일 때도 있고 어떤 날은 사십 개 일 때도 있어.”

“뭐가?

“비행기가.”

“...?”


엄마와 산책을 하던 길이었다.

고층아파트 사이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을 세 보니 그렇더라고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오빠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저녁 시간에 아들 부부가 거실에 나와 앉아있을 때 거실에 나가면

행여 불편해 할까싶어 방 안에서 창밖 하늘 위로 지나가는 불빛들을 셌다.

그 것이 비행기더라고 했다.

하나, 둘, 셋, 넷...

세다보면 자꾸 까먹어 어느 날엔가 부터 종이에 ㅣ 로 표시를 했는데

그 것이 어느 날은 60개였다가

40개이거나 30개 이던 날도 있더라는 얘기였다.

순간 가슴 안에서 뭔가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통화를 할 때마다 뭐하시냐는 말에

엄마는 늘


“뭐하긴, 테레비보지.”


했었다.

그러면서 14인치 모니터로 지상파 채널만 보는 우리한테

왜 너희는 테레비를 안 사냐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옛날 드라마를 다시 해줘서 이 채널 저 채널 돌려 보는데 아주 재미있다고도 했다.

아들이 읽으라고 사다준 책은 눈이 아파 안 읽는다고 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안하고 맨날 놀러만 다녔으니 그렇지.”


라고 놀리면 엄마는 깔깔 웃었다.


TV 한 프로그램에서 치매에 걸린 노인이 ‘이것’만 보면 정신이 말짱하다고 했다.

그 ‘이것’은 바로 화투였다.

가족도 못 알아보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노인은

온종일 한 자리에 앉아 화투패를 뗀다.

가끔 자녀들이나 동네 지인들이 들러 할머니와 민화투를 치면

번번이 점수가 많이 나서 이길 뿐 아니라

남의 점수까지 확실하게 셈을 할 때에는 치매 노인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방금 전에 pd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고는

화투를 치다가 다시 화면을 쳐다보며


“그런데 너는 누구야?”


물으며 해맑게 웃는다.

분명한 건, 할머니는 화투를 칠 때 행복해 보인다.

너무 한 자리에만 오래 앉아 있는 것이 걱정이 돼서

때로 할아버지가 화투를 감춰보기도 하지만

화투가 보이지 않을 때 할머니는 역정을 낸다.


외할머니도 생전에 화투떼기를 좋아하셨다.

손주들을 앉혀놓고 화투를 치다가 패가 불리하다 싶으면

에이 에잇! 하면서 화투판을 헝클어뜨리며 장난스럽게 웃으셨다.

지금보다 젊을 때 엄마가 화투를 떼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지금 엄마는 화투를 치지 않는다.

노인정에서의 일과는 화투였지만

문이 닫힌 후로 화투도 그만 둔 셈이다.

색칠하라고 사다 준 그림책도 금방 시들해졌다.

영어를 못 배운 것이 한이라고 했을 때

내가 사다 준 알파벳 그림카드도 어느 구석으로 처박힌지 오래다.

한동안은 아들이 구해다 준 트로트 음원을 들으며 따라 부르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목소리가 안 나온다며 듣는 것도 그만 두었다.

엄마에게 비행기를 세는 새 놀이(?)가 생긴 줄은 몰랐다.

코로나는

엄마의 세상을 세 평 남짓한 방구석으로 좁혀놓았다.


지난 해 마지막 날에 엄마는 손을 다쳤다.

손이 불편해서 몸을 씻을 수 없으니

우리 집으로 와서 내가 씻겨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와 만났을 때 시간은 대충 이렇게 흘러간다.

첫날은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고

둘째날은 이야기 도중 어딘가에서 엄마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고

셋째날은 잔뜩 어색해져서 엄마가 집으로 가 버린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는데

둘째 날이었던 어제 엄마는 고개를 외로 돌리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늙지 않았다.

화투를 치든 비행기를 세든

엄마는 엄마의 방식대로 이 시간을 견디고 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나쁜 딸이라서일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넌 참 별 걸 다 기억하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