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삶의 바닥에서 꾸며낸 장례극
영화의 제목 <고당도>를 처음 들었을 때, 혀끝이 아릴 만큼 달콤한 과일의 당도(糖度)를 떠올렸다.
그러나 오프닝 시퀀스에서 한자 '고(故)' 자가 떠오르는 순간,
이 영화가 품은 서늘한 의미를 직감하게 된다.
'고인(故人)에 당도하다.'
영화는 깨어나지 못하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각자의 나름의 벼랑 끝에 몰린 한 가족의 기상천외하고도 씁쓸한 생존, 소동극을 그린다.
저예산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 영화 순위 2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이 작품은,
얕은 탄식과 실소를 번갈아 자아내며 우리를 조촐한 장례식장 한가운데로 초대한다.
간호사인 주인공 선영은 쓰러진 아버지가 더 이상 깨어날 수 없다는 절망적인 판정을 듣는다.
물론 그녀는 대단히 슬퍼하진 않는다. 워낙에 오래 간병을 했던 탓일까.
이후 친동생 일회 가족에게 연락을 돌린다.
병원으로 달려온 동생 일회와 그의 아내 효연, 그리고 조카 동호.
사업을 말아먹고 빚쟁이에게 쫓기는 일회와,
의대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해야 할 처지인 동호
이 가족에게 아버지는 슬픔의 대상이기 이전에, 당장 눈앞의 현실을 타개할 유일한 '수단'이 된다.
선영의 진두지휘 아래, 부자인 고모를 타깃으로 한 조촐한 가짜 장례식을 치른다.
결과적으로 고모에게 천만 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빚에 쫓겨 두려움에 떨던 일회가 그 돈을 자기 빚을 갚는 데 몽땅 써버리며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담보로 잡은 이들의 계획은 도덕적으로 밑바닥을 향해 가는 듯 보인다.
선영이 과거 쓰러진 아버지를 방치한 듯한 플래시백이 스치기도 하지만,
흥미롭게도 감독은 이들을 완전한 악인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완전한 파멸이나 지독한 인간성의 상실로 침잠하기보다,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소시민의 구차함에 머문다.
이 얕은 심연은 영화를 너무 무겁지 않게 만들지만, 동시에 아쉬움을 남기는 양날의 검이 된다.
첫 번째 장례식이 꽤 성공적(?)이었음을 맛본 일회는
선영에게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 장례식을 치르자고 애걸복걸 부탁한다.
그리고 선영의 계획을 진행하면서 아버지의 장례식은 꽤나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다만, 여기서 세 번째 고당도가 튀어 나온다.
가짜 장례식인 걸 눈치 챈 동호가 자신의 아버지 일회의 장례식까지 치르자고
선영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던진 것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아버지에 대한 증오
- 쫓기는 생활을 끊어내고 싶은 마음
여기서부터 영화의 갈등은 다소 헐거워진다.
인간의 깊은 내면을 탐구하기보다는 겉면을 맴도는 직관적이고 평이한 전개가 이어진다.
가짜 장례식장에 들이닥친 빚쟁이들이 사망진단서를 믿지 않고
막무가내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너무 1차원적이다.
일회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자 사람을 죽일 듯 패던 빚쟁이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흐름이나,
목숨을 건진 일회가 품고 있던 동호의 등록금 뭉치를 꺼내 보이며
가족의 갈등이 봉합되는 결말도 다소 안일하게 느껴진다.
독립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뾰족함이 무뎌진 기분이다.
기왕 밑바닥을 보여주기로 했다면 일회든 동호든 끝까지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선영의 과거 트라우마나 동호를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내밀한 감정선이 조금 더 세밀하게 배치되었다면 훨씬 밀도 높은 서사가 되었을 것이다.
앞장서서 가짜 장례를 제안했던 일회가 돌연 "아버지 괜찮은 거냐"며 인간성을 드러내는 장면 역시,
결말을 위한 작위적인 복선처럼 느껴져 캐릭터의 일관성을 해친다.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고당도>가 이룩한 성취는 결코 가볍지 않다.
병원, 장례식장, 다리 위라는 극히 제한된 로케이션만으로
이 정도의 서스펜스와 몰입감을 끌어낸 것은 오롯이 연출과 기획의 승리다.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서 넷플릭스 2위라는 성적표를 거머쥔 것은,
부족함을 영리한 아이디어로 돌파해 낸 독립영화의 저력이다.
<고당도>는 혀가 얼얼할 만큼 달콤하거나,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자극적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씹을수록 단맛이 다 빠져버린, 쌉싸름한 칡뿌리 같은 영화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인간의 구차한 생존 본능을 가볍게 들여다보고 싶은 날이라면
기꺼이 이 영화에 당신의 시간을 내어주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