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 어땠지?

빛이 꺼진 어른들의 세계에 소녀가 보내는 텔레파시

by 인절미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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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기어이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려는, 서툴고도 눈부신 안간힘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자신을 둘러싼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지를.


11살 소녀 '후키'가 마주한 현실도 그렇다.

아빠는 말기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고,

엄마는 삶의 무게와 피로에 짓눌려 딸과 철저히 불통인 상태다.

보편적인 언어와 따뜻한 사랑을 동력으로 부모와 교류하지 못한 아이는 필연적으로 상처받고 고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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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파시, 이해받지 못한 아이의 가장 간절한 S.O.S


영화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텔레파시'나 '최면' 같은 초자연적 소재는

그저 아이의 단순한 호기심으로 읽히진 않는다.


그것은 평범한 방식으로는 자신을 방임하는 어른들에게 가닿을 수 없었던 후키가,

어떻게든 그들과 연결되고자 시도한 처절하고도 간절한 S.O.S 신호 같기도 하다.


후키는 영어 학원에서 만난 친구, 그리고 병석에 누운 아빠와 텔레파시로 카드 맞추기 놀이를 한다.

아빠는 한 번 정답을 맞히지만, 한 번 더 해보자는 후키의 제안을 무심히 거절해 버린다.

아주 찰나의 교감 직후에 찾아온 단절.

후키는 짙은 실망감을 느낀다.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리 있는 엄마와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후키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겉돌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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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조명마저 철저히 통제된 어둠, 그리고 간헐적인 빛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과감한 지점은 단연 '조명의 배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숨이 막힐 만큼 어둡다.

병원 복도와 병실은 물론이고 후키의 집 안조차,

창문으로 스며드는 자연광 외에는 거진 어떠한 인공적인 빛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보통의 영화라면 연출적 허용을 구하고 조명을 켤 법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어둠을 유지한다.

이는 후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가 그토록 캄캄하고 희망이 부재한 곳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이 철저한 어둠 속에서 인공조명이 켜지는 아주 드문 순간들이 있다.

대표적인 씬이 바로 엄마와 후키가 마주 앉아 저녁을 먹을 때다.

영화 내내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그 빛은 분명한 목적을 지닌다.

비록 관계가 서먹할지언정, 엄마와 대면하여 온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 식사 시간만큼은

후키의 기억 속에 희망과 교류의 가능성이 열린 '밝은 순간'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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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와 <잘 자 푼푼>, 그 갈림길에서 선택한 미소


영화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 엔딩, 마침내 엄마와 텔레파시를 시도하는 장면이다.

아사노 이니오의 만화 <잘 자 푼푼>에서 방치당한 푼푼이 끝내 성장하지 못한 채

미숙한 아이로 남아 파국을 맞았던 것과 달리, 후키와 엄마에게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텔레파시 카드 맞추기에서 엄마는 첫 번째 시도에 오답을 낸다.

하지만 이번엔 아빠 때처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답을 외친다.


그 소리를 들은 후키의 얼굴에 번지는 옅은 미소는 영화가 건네는 가장 큰 위로다.


오답을 외치면서도 애쓰는 엄마의 노력이 귀여워서였을까,

아니면 아주 미세하게나마 마음의 주파수가 통하기 시작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후키는 그 미소를 통해 불완전한 엄마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마음먹는다.


소마이 신지의 <이사>에서 주인공 렌코가 축제 무리를 홀로 빠져나오며

어른들에게 기대지 않는 단단하고 독립적인 자아를 성취했다면,

<르누아르>의 후키는 다른 방식의 성장을 택한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어른들의 세계에서 도망치거나 작별 인사를 건네는 대신,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그 세계에 기어이 다시 섞여 들어가 보겠다는 다짐.


완벽하지 않은 어른이라도 괜찮으니 서로를 포기하지 말자고,

어둠 속에 간헐적으로 켜진 조명 아래서 영화는 조용히 관객들에게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