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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포자가 날아간다 (2/3)

by 걍마늘

신혼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로테르담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진주귀고리 소녀의 델프트를 거쳐 헤이그 특사의 그 헤이그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1박 2일간의 여정이었다. 로테르담에서 헤이그는 자전거로 두 시간 남짓한 거리고, 코스도 평이했다. 다행히 별다른 사고 없이 제시간에 도착해, 자전거를 반납할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는데 숙소로 가는 길에 트램을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다 돌이켜보니 불현듯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이다.

로테르담으로 돌아오는 길에 델프트 부근에서 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나게 델프트로 빠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가 광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우리가 델프트에 들르기로 했었나 싶었다. 뒤따라오던 아내는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고, 가야 할 길은 아직 절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둘 다 휴대폰에 현지 유심이 없었고, 나는 영어를 못했으며, 아내는 지도를 볼 줄 몰랐다. 나침반과 지도는 내가 들고 다녔다. 정말로 도중에 헤어졌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하니 아찔했다.

나는 인파로 북적이는 광장에서 초조하게 아내를 기다렸다. 아내는 델프트로 빠지는 길을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되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내가 먼저 로테르담 쪽으로 가 버리면, 만약 아내에게 체인이 빠졌다거나 하는 일이 생겨 늦는 거라면, 그래서 길이 어긋나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나는 국제 미아가 되기에 충분했다. 아내가 델프트로 빠지는 나를 보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내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나는 델프트에 있어. 나는 델프트에 있어…. 그러자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아내가 나타났다. 너무나 반가워서,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아이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다시 만났을 때 아내가 뭐라고 했더라. 뭐가 그렇게 신났어, 라고 했던가.

다른 글은 안 쓰고 싶어.

때 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어둠이 내린 트램 정거장엔 우리밖에 없었다. 여행 속의 작은 모험을 마친 직후였다. 숨 막히게 짙은 파란색 하늘과 그 위로 늘어진 트램을 위한 가선(架線)과 로테르담의 검은 실루엣과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자기만 한 배낭을 짊어진 아내의 흐릿한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소설만 쓰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꽤 오랫동안, 경제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결혼 전까지 나는 남의 글을 대신 써 주거나 고쳐 주는 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나름 재미도 있었다. 보람도 없진 않았다. 문제는 도무지 내 글을 쓸 여력이 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나를 도와달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혼여행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시기적으로도 적절치 않았다. 어쩌면 이국땅에서의 모험이 남긴 여운이 결국은 입 밖으로 그 말을 밀어내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라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트램이 왔고, 이야기는 중단됐다. 끝내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고요한 트램 안에서 어둠에 잠긴 이국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갈까? 환기도 하고, 기분 전환도 할 겸.”

아내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곰팡이로 뒤덮인 벽은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델프트, 헤이그 따위로 빈틈없이 가려져 마침내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방이 전보다 넓어 보였고, 마음도 그만큼 너그러워졌다.

창문을 활짝 열고 집을 나선 우리는 하늘이 도랑처럼 보이는 음침한 골목을 빠져나와 노란 은행잎이 깔린 언덕을 올랐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은행잎들이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노란 손수건 같았다. 언덕길에서 보는 가파르고 긴 언덕과 산등성이를 빽빽하게 뒤덮은 집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 안에 속해 있지 않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었다.

우리는 종종 언덕길 중간에 있는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캔 커피를 마시며 마치 노천카페에서 사람을 구경하듯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타는 사람, 내리는 사람, 뒤쫓는 사람을 구경했다. 때로는 누군가의 통화를 엿들으며 실패한 연애담을 털어놓았고, 어느 날은 언덕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샌프란시스코의 언덕을 떠올렸다. 이어폰을 나누어 꽂고 샌프란시스코를 그리워하는 음악을 들으며 트램을 기다리는 상상을 했다. 그때 보았던 오렌지 레드와 코발트 블루로 나뉜 저녁 하늘은 다른 세상처럼 신비로웠다. 지긋지긋한 동네였지만, 분명 좋았던 순간들도 많았다.

“커피?”

편의점 앞에서 내가 물었다.

“음… 아니, 나는 딸기우유가 좋겠어.”

“딸기우유?”

“커피가 안 당기네.”

그래서 아내는 딸기우유를, 나는 커피우유를 편의점에서 사 들고 나와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어머님 병원이 언제지?” 아내가 물었다.

부정맥이라고 했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듯 뛰고 숨이 차는 일이 많아져, 퇴직한 남편 때문에 난 화병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검사를 받아 보니 심혈관계질환이 있었다. 돌연사의 구십 퍼센트가 부정맥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했다.

“다음 달 말.”

“나… 사표 내려고.”

대화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왜?”

아내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그곳은 내가 난생처음 겪는 소송 문제로 찾이간 법률사무소다. 자서전 대필 계약금 반환 소송이었다. 마감 지연, 품질 미달이 사유였는데 마감 일자 변경도, 완성한 원고의 수준도 출판사와 작업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편집자와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을 마쳤으므로 돈을 받아야 하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럼에도 의뢰인이 소송을 제기하자 출판사는 모르쇠로 일관했고, 하나뿐인 은행계좌가 가압류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체크카드가 정지되는 바람에 버스조차 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법률사무소를 찾았다. 아내는 맨 처음 나를 맞이한 직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변호사에게 비용에 대해 듣고 낙담한 채 발길을 돌린 나를 쫓아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손을 내밀어 준 은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최종적으로 약속한 날짜에 완료됐고, 출판사와 주고받은 이메일로 정황 논리는 충분히 성립하니까 출판금지가처분신청을 하시면 돼요. 그럼 저쪽에서 합의를 요청할 가능성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조언한 대로 의뢰인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뒤 나 홀로 소송을 준비했다. 그러자 정말로 합의 요청이 들어왔고, 합의금을 받는 대신 원고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소송은 결국 취하되었다.

알고 보니 계약을 해제하고 큰 출판사로 옮기려는 의뢰인의 꼼수가 있었다. 원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출판사의 초고가 되어버린 내 원고에 대해서는 한 푼도 지불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름 성공했다는 영농인이었는데, 그가 절절하게 진술한 대인의 풍모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덕분에 아내를 만났지만, 나는 그때 처음 내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

“7주래.”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로테르담의 트램 정거장에서 대책 없는 나의 선언을 들었을 때 아내도 이랬을까. 밀어닥치는 거대한 해일과 마주 선 기분이었다. 눈을 감는 것 외에 현실을 피할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는 지푸라기조차 되지 못할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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