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를 뒤집자 와르르 지도책이 쏟아진다. 네덜란드 관광지도다. 나는 네덜란드로 신혼여행을 갔다. 돈은 없지만 어쩌면 결혼도, 외국도 한 번뿐일지도 모르니까 한 번쯤 가 보고 싶었던 나라를 가 보는 것이 좋을 듯해 대학생들처럼 배낭여행을 하기로 했다. 지도책은 일종의 기념품이었다.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는 족족 한 움큼씩 집어온 것이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여행을 다녀와 처박아놓은 후로는 한 번도 상자를 열어본 적이 없다. 지도책 하나를 펼쳤다. 암스테르담 지도다.
첫 외국 여행이 외국에 대한 인상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나의 경우, 처음의 설렘과 기대는 스키폴공항 입국심사대에서부터 무너졌다. 완전히 얼이 빠져서는 담당자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커다란 노란색 안내판에 쓰인, 영어가 병기된 영어가 아닌 낯선 단어와 사방에서 들려오는 외국어와 동양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 환경은 내가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지하철을 찾아 헤매고, 표를 끊고,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여 한 구간의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없는 어두운 터널을 질주하며 내릴 곳을 지나칠까 걱정하고, 인파에 휩쓸려 밤의 어둠에 배경이 모두 지워진 역 광장으로 떠밀려 나오는 동안, 불안은 어느덧 거대한 두려움으로 자라났다. 네덜란드에서는 대마초가 합법이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죄다 마약중독자로 보였다. 역사(驛舍)의 위용이라든가 건축양식 따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운하와 골목은 거울에 비친 거울상처럼 끝도 없이 이어졌고, 예약한 숙소가 위치한 거리는 도무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미심쩍은 남자들로 북적이는 홍등가뿐이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직관에만 의지해 걷던 나는 어깨를 흔드는 아내의 손길이 닿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내가 빨간색 차양이 줄 지어 달린 건물을 가리켰다. 가슴골이 보이게 블라우스 앞섶을 풀어헤친 미니스커트 차림의 직업여성이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저 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지만,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장소여서 그랬는지 의외로 책이 두꺼워서 그랬는지 눈길을 사로잡는 구석이 있었다. 어쨌거나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민망해 이유를 물으려는데 아내가 대뜸 여자한테로 가 주소를 적은 쪽지를 보여주며 길을 묻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다. 여자도 그런 듯했다. 하지만 이내 호의적인 태도로 아내를 대했고, 나보다 영어 실력이 나은 아내는 그녀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읽는 책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했다. 놀랍게도 여자는 몽테뉴를 읽고 있었다.
“곰팡이는 보험 처리 안 되나?” 아내가 코를 풀며 말했다.
옷가지에 가려진 행거 뒤편은 마치 외계의 꽃밭 같았다. 색깔이 다른 온갖 곰팡이들이 벽면 가득히 다채롭게 번져 있었다. 걸레로 박박 문지르다 벽지가 찢어지고 시멘트벽이 드러나고 나서야 단순히 닦는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곰팡이가 하얗게 내려앉은 옷가지를 모조리 내다 버리고 피해액을 추산해 보니 얼추 세 달치 월세였다. 도배까지 하면 네 달치. 경솔하게 걸레질을 한 내 탓인가 싶기도 하고 돈 얘기를 할 처지도 아닌지라 눈치만 보고 있는데 아내가 입을 열었다. 지도를 어디다 뒀더라?
“보험?” 나는 활짝 펼친 암스테르담 지도 네 귀퉁이에 투명 테이프를 붙여 검은곰팡이가 밀집한 부분을 조심스레 덮었다.
“산재처럼 말이지. 집도 문제가 있는 거잖아. 시공할 때 제대로 했어봐.” 아내는 계속해서 코를 풀었다. 최근 들어 비염이 더 심해졌다. 곰팡이 탓이 분명하다.
우리는 조각보를 누비하듯, 지도책을 하나씩 펼쳐 열심히 벽을 덮어나갔다. 다양한 종류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과 헤이그와 델프트 지도가 있었다. 가 보았거나 가 보지 못한 박물관과 미술관, 국립 공원 지도도 있다. 붙여놓고 보니 상상한 것보다 훨씬 그럴싸했다.
“역에서 멀지 않았네.” 나는 지도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내가 곁에서 나처럼 암스테르담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어디가?”
“유스호스텔.”
마침내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퉁명스러운 직원에게 체크인을 하고, 다양한 체취와 덜 마른 세탁물 냄새가 떠도는 공기를 가르며 이층 침대들 사이로 조심조심 나아갔다. 수용 인원이 스무 명쯤 되는 도미토리였다. 우리가 잘 침대는 맨 안쪽에 있었다.
침대 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창가로 가 커튼을 열어보았다. 고풍스러운 유럽풍 건물의 불빛들이 검은 운하 위로 녹은 금처럼 흘러내렸다. 멀리 시계탑이 보였다. 저녁을 먹기에는 늦었지만 자기에는 조금 이른 애매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라운지 바에서 파는 하이네켄과 땅콩 따위를 사 들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일렁이는 운하를 바라보며 맥주 한 병을 둘이서 나눠 마셨다. 둘 다 외국 여행은 처음이고, 열두 시간이 넘게 무릎이 앞 좌석에 닿는 비좁은 이코노미 석에 갇혀 자다 깨다 하며 혼미한 정신으로 날아왔지만, 마음이 들떠서인지 시차로 인한 피곤은 느껴지지 않았다.
운하 건너편에 있는 고급 호텔처럼 보이는 건물 테라스에서는 삼인조 밴드의 재즈 연주가 한창이었다.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났고, 하나같이 여유가 넘쳤다.
저 사람들은 뭘 먹을까? 아내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나는 와인? 스테이크? 하다가 어쩐지 머쓱해져 맛없는 땅콩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맛이 없을 수 없는 땅콩이 그렇게나 맛이 없기는 태어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품평에 동의한 아내는 오래된 게 아닐까 의심하며 봉지에 붙은 라벨을 살펴보았다. 견과류에 생기는 곰팡이는 독소를 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옆 벤치에서 정성스레 잎담배를 말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담배를 입에 문 그는 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라이터 불을 튕기다가 갑자기 나에게 뭐라고 했다. 나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거슬렸나 싶어 아내에게 물어보니 불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남자는 바로 자리를 떴다.
춥다. 나는 먹다 만 땅콩을 슬쩍 벤치에 놓아두고 일어섰다. 도미토리는 무덤처럼 고요했다. 모두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위층 침대로 올라가 함께 이불을 뒤집어썼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뒤척거렸다. 신혼 첫날밤이었고, 아래층은 필요 없을 듯했다. 그러다 문득 땅콩의 행방이 궁금해져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누가 우리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다람쥐처럼 뭔가를 집어먹으며 오물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그 남자였다. 그것은 우리가 버린 땅콩이 틀림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길고 요란스럽게 코를 푼 아내가 하늘을 나는 새의 시점으로 암스테르담을 부감한다.
“그게 대마초였을까?”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서서, 남은 벽이 얼마나 되는지 지도는 얼마나 남았는지 남은 지도로 남은 벽을 메우는 것이 가능한지 가늠해 보았다.
“대마초? 아.”
“진짜로 상한 땅콩이었으면 어쩌지?”
“걱정도 팔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