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번 인경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오히려 한 번이라 더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전공의 시험 끝나고 밥이나 한번 먹자고 했더니 정말로 전화가 와 함께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데이트 신청은 아니다. 임상 실습 때 같은 조였던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랄까. 실은 지나가듯 한 말이고 시험 때문에 정신이 없던 터라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놀랐다.
덕분에 데이트 비슷하게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가고 비싼 커피도 마셨다. 그러고 나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었는데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인경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폐장을 앞둔 놀이동산 앞을 지날 때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래.”
부지 소유권이 시로 넘어가 공원화 계획에 따라 시설이 철거될 예정이라고 했다. 입장료는 무료였으나 놀이기구는 운행하지 않았다. 사진 찍기 좋게 가로등과 조명 들을 켜 놓았을 뿐이었다. 연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불이 모두 꺼질 때까지 놀이동산을 거닐었다. 잠든 롤러코스터와 고요한 바이킹과 뒤엉킨 범퍼카와 녹슨 회전목마는 그곳을 시간이 정지한 세상처럼 여겨지게 했다. 시간은 우리 사이에서만 흘렀다. 잠깐이지만 영원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흔히들 4차원, 4차원 하지만 3차원에 사는 인간은 4차원을 볼 수 없다고 하잖아. 개미가 지구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만국기가 펄럭이는 천막 극장 앞이었다.
“마술쇼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어. 마술사에겐 4차원이 보이는 게 아닐까. 깡충깡충 뛰어가는 토끼를 4차원으로 보내면 4차원에서 푸드덕 비둘기가 날아와. 하지만 우리 눈에는 토끼가 비둘기로 변한 것처럼 보이지.”
인경이 대뜸 천막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가림막을 걷으면 마술사는 사라지고 코끼리가 등장해. 마술사는 어디로 갔을까? 그전에, 코끼리는 어디 있었을까?”
천막 안은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무대 아래 있을 장치를 떠올리다가 그냥 내가 이해한 대로 말했다.
“들고 있던 사과를 4차원으로 옮겨 놓고 4차원에 놓아두었던 바나나를 가져온다는 얘기잖아.”
그러자 그녀가 처음 보는 환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진짜처럼 느껴진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정답.”
이쯤이었나.
인경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서 있던 자리에서 CCTV를 찾았다. 그녀가 어느 쪽을 보았는지 기억해 냈다. 별다른 건 없었다. 먼지 낀 창문 너머로 시외버스가 늘어선 승차장이 보이고 벽면엔 실종 어린이를 찾는 포스터가 붙었다.
실종 연도와 나이를 확인해 보니 살아있다면 내 또래다. 그는 여섯 살 때 부모와 이별했다. 삼십 년 전 일인데 부모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흐릿한 사진 속의 그는 삐뚤어진 바가지머리에 불만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아마도 부모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리라.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상 쓰지 마라. 나이 먹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하지만 나는 내가 인상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한 계절이 지나는 동안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인공호흡기를 달았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무용지물이 됐다. 두 번째 부인과 자식들 때문이다.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 명확히 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분당의 노른자 땅에 위치한 아버지의 빌딩은 양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세 번째 부인과는 연명 치료에 대해 합의가 된 상태였다. 떠난 자들이 몽니를 부렸다. 결국 두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연명 치료와 더불어 소송이 벌어졌고 아버지는 소송이 끝나야 죽을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도.
대합실에서는 희미하게 비린내가 났다. 바다 근처라서인지 재래시장이 가까이 있는지 누가 생선을 싸들고 왔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냄새는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버스 터미널은 애초의 모습 그대로 빛만 바랜 듯하다. 시간이 멈추었다고 해야 할지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고 해야 할지 바가지머리 아이가 실종된 삼십 년 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버스 터미널을 나와 큰길가에 있는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하얗게 센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노인이 벤치에 앉아 있다. CCTV 속의 그녀도 여기서 버스를 기다렸을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처럼, 보도블록 틈새로 피어난 노란 민들레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쓰나미가 해변을 덮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날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기억한다. 이곳은 지금처럼 고요했을 것이고 모든 것이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평화로웠을 것이다.
해변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내리는 문 맞은편 자리에 앉아 아마도 그녀가 보았을 풍경을 가만히 따라간다. 그러자 특별할 것 없는 시골 풍경이 어쩐지 목가적으로 다가왔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은 선글라스를 쓴 운전기사와 노인과 나뿐이다. 우리는 버스가 튀어 오를 때마다 똑같이 흔들린다.
노인은 한적한 산중턱에 내렸다. 빛바랜 아스팔트 도로와 우거진 수풀밖에 보이지 않는 곳이다. 농막 비슷한 건물조차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혼자 산속에서 지내는 노인일까 궁금해한 것도 잠시, 이제 남은 승객은 나 혼자고 버스는 묵묵히 제 갈 길을 간다. 산을 넘자 눈사태가 난 것처럼 안개가 밀려든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익숙한 일인 양 아무렇지 않게 운전을 계속했다.
나는 뿌옇게 흐려진 바깥 풍경과 백미러에 비친 운전기사를 번갈아보다 그가 저승사자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저세상으로 가는 버스를 탄 기분이 들었다.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이 길을 지날 때도 이러했을까.
안개는 점점 더 짙어져 해안가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한 치 앞도 분간이 안 됐다. 나를 부려놓은 뒤 지체 없이 떠난 버스는 이내 안갯속으로 사라졌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땡땡, 종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안개 위로 붉은빛이 어른거린다. 기차가 규칙적으로 쇳소리를 내며 안개를 가른다. 등 뒤에 기찻길이 있었다. 그 빛은 신호등 불빛이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파란빛이 떠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단기가 올라간 철도 건널목을 빠른 걸음으로 건넜다.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 해변도 마찬가지다. 나는 파도 소리가 선명해지는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모래가 하염없이 구두 안으로 들어왔고 급기야 걷기가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구두를 벗으려는데 모래밭에 반쯤 묻힌 납작한 것이 눈에 띄었다.
모래 속에서 그것을 끄집어냈다. 트럼프 카드다. 클로버 퀸이었다. 페르시아 양탄자를 떠올리게 하는 뒷면의 문양이 독특하다. 해무가 깔린 해변에서 발견한 카드는 그 문양만큼이나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카드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고개를 들자 마술처럼 안개가 걷혔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마치 꿈이 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