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언제부터 있었는지 해변으로 나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갈매기들이 어지러이 나는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포즈를 잡는다. 무릎까지 바짓단을 걷은 남자와 치맛단을 들어 올린 여자가 파도가 밀려드는 해안을 따라 걷는다. 개구쟁이 남자아이가 옷이 젖거나 말거나 파도와 대결을 벌인다. 교복을 입은 소녀가 가는 두 다리로 단단히 모래사장을 딛고 서서 바다 저편을 응시한다. 소녀는 시름에 젖은 듯한데 재난의 흔적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해변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장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햇살은 맑고 해변은 더없이 평화롭다. 방금 전까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로 허공에 가만히 떠 있다. 철새들은 눈으로 자기장을 보고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를 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빛을 본다. 때때로 비행하는 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법칙을 일깨운다.
나는 허공의 빛줄기를 보며 날아가는 새의 시점을 상상하다가 하나의 세상에 공존하는 두 개의 세계를 떠올렸다. 카드도 그렇다. 카드는 위아래가 없다. 거울상과는 다르게 어느 쪽에서 봐도 좌우가 똑같다. 알라딘의 매직 카펫 같은 뒷면의 대칭 문양도 마찬가지로 상하좌우가 없다. 하나의 세상에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설마.
인경은 트럼프 카드를 책갈피로 썼다. 놀이동산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인경은 앉고 나는 서서 그렇게 마주 보며 가게 되었는데 할 말이 떨어져 어색하던 참에 인경이 책을 펼쳐 들었다. 무슨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책갈피가 꽤나 인상적이어서 관심을 보였더니 ‘해리 후디니’가 사용했던 이스탄불 덱이라고 했다.
그때 인경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궁금해서 찾아본 내용을 바탕으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해리 후디니는 20세기 초에 탈출 묘기로 유명세를 탄 마술사다. 수조나 금고 같은 밀폐 공간에서, 단순 해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수갑, 족쇄, 쇠사슬 따위의 구속 도구로부터 벗어나 순식간에 탈출하는 마술이다. 무엇으로도 자신을 속박할 수 없다며 허세를 부리다가 한 대학생에게 복부를 가격당해 맹장 괴저와 복막염으로 죽은 허무한 생애를 요약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일종의 영매 의식인 강령술에 심취했다는 사실이다.
마술이란 곧 마법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속임수지만 과학적이다. 그러나 강령술은 마법이다. 신비주의고 비과학적이다. 보이는 모습은 똑같지만 정반대의 관점을 취했다.
다른 하나는 사후에 전부 폐기하기를 원한 그의 마술 도구들이 그가 죽고 나서도 제자의 제자로 이어져 이십 년 가까이 쓰이다가 경매 시장에서 모두 팔려나갔다는 사실이다. 그중 하나인 이스탄불 덱은 오스만 제국 말기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카드로,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카드를 만졌다고 하며 십 대 때 이미 정식 무대에 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경이 갖고 있던 카드가 바로 그 이스탄불 덱이다.
인경은 시간이 나면 미술관이 아니라 마술쇼를 보러 간다고 했다. 그래서 농담처럼 마술 하나만 보여 달라고 졸랐더니 자신은 보는 걸 좋아하는 거라며 마술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거라고 응수했다. 내가 모래밭에서 주운 클로버 퀸은 어쩌면 그날 쓰나미가 이곳을 덮쳤을 때 인경이 잃어버린 카드인지도 몰랐다.
웃통을 벗은 소년들이 왁자지껄 몰려가 일제히 바다로 뛰어든다. 햇빛이 그들이 만든 물보라에 산산이 부서지며 빛난다. 근육이 멋지게 자리 잡은 몸이다. 그들은 해변에서 한참 떨어진 바위섬까지 수영 시합을 했다. 거세게 밀려드는 파도를 거스르며 힘차게 나아갔다. 영원히 살 것처럼 젊음을 낭비하고 청춘을 허비하는 뒤를 생각하지 않는 무모함이 한편으로는 부럽다.
그러나 교복을 입은 소녀에게 소년들은 관심 밖이다. 소녀는 벗은 신발을 손에 들고 모래밭만 살폈다. 무얼 잃어버렸나. 평일 오후다. 근처에 산다면 학교를 땡땡이친 정도겠지만 멀리서 왔다면, 가출이라도 했을까. 물론 부모님과 함께 왔을 수도 있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경이 쓰인다.
배가 출출해 버스 정류장이 있는 도로 쪽으로 다시 나왔다. 그런데 점심 장사까지만 하는지 문을 연 음식점이 하나도 없다. 지나가는 차도 없어 도로는 텅 비었고 사람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 모텔 옆에 구멍가게가 있어 그리로 갔다. 그러나 먹을 게 마땅치 않기는 그곳도 마찬가지다. 즉석식품은커녕 컵라면조차 없었다.
캔 커피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친 노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인기척을 냈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대로 가게를 나가도 모를 것 같다. 말아 쥔 손을 입에 대고 크게 헛기침을 했다. 노인은 그제야 눈을 끔뻑거리며 바로 앉는다. 예전에 즐겨 피운 담배를 보니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나 88라이트와 일회용 라이터도 하나 달라고 했다. 귀가 어두운 듯해 큰 소리로 반복해서 말했다. 신용카드를 건넸더니 처음 보는 물건인 양 이리저리 살펴보다 고개를 젓는다. 마침 만 원짜리 지폐가 있어 그걸로 계산했다. 거스름돈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속으로 물건 값도 예전처럼 받나 하고 말았다. 이십 년쯤 시간을 거슬러 온 기분이었다.
파라솔을 펼친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마침 누가 재떨이로 쓴 종이컵을 놔두고 갔다. 연기를 삼키자 머리가 핑 돈다. 연기에 긁힌 목구멍은 다디단 커피로 달랬다.
휴대폰을 켜려다가 만다. 어딜 간다 말도 없이 무작정 병원을 나왔다. 걷다 보니 지하철역이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고속버스 터미널이었다. 행선지는 자연스레 동해로 정해졌다.
소년들이 물을 뚝뚝 흘리며 몰려왔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서려는데 변성기 소년의 굵고 탁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는다.
“교복 입은 애 봤어?”
소년들은 사냥감을 발견한 야수들처럼 작당모의를 했다. 곁에서 내가 듣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이빨 같은 말들을 듣고 있자니 그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고 실제로 일어날까 싶기도 했으나 소녀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소년들은 거칠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태세였다. 그들에게 소녀는 하나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아저씨!”
나를 부른 듯했지만 모른 체하다가 아저씨 소리를 몇 번 더 듣고 나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담배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잘생긴 소년이 호의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빌리긴 뭘 빌려. 갚을 거냐?” 뒤에서 다른 소년이 빈정거리듯 말한다. 나는 잔뜩 긴장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담배와 라이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어차피 끊은 담배다. 건강에도 안 좋고.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너희들이야 내가 알 바 아니니. 그렇게 애써 소년들을 무시하고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는데 등 뒤에서 누가 쫄았나, 하며 낄낄 웃는다.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재촉했다. 소년들보다 먼저 소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