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
며칠 전 처형이 아내에게 한 말이다. 처형은 워킹맘(직장맘)이다. 여덟 살, 네 살 두 딸을 잘 키우고 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원더우먼’이다. 처형이 잠, 휴식, 친구 등 많은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원더우먼도 가끔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날 오전 처형은 어린이집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 예린이가 열이 있는데다 밥도 먹지 않고 하염없이 울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처형에게 예린이를 일찍 하원시키는 게 좋겠다고 했다. 벌써 그 주에만 두 번째였다. 어린이집에서는 예린이가 새로운 반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일주일동안 일찍 하원시키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처형에게 전했다.
처형은 이번 달 이미 여러 차례 휴가를 냈다. 첫째 유라가 초등학교에 입학함에 따라, 챙길 게 많았던 탓이다.이런 상황에서 또 조퇴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처형은 고민 끝에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를 돌보고 있는 아내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다행히 일을 하고 있는 예린이의 할머니가 예린이를 돌보기로 하면서, 처형은 위기를 넘겼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위기의 순간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을까.
처형이 겪은 일은 모든 워킹맘들의 얘기이기도 하고, 당장 우리 부부의 가까운 미래다. 우리 부부는 당장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 처가는 포항에 있고, 안양 본가의 부모님은 새벽까지 노래방을 하신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급하게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할 때, 도와줄 사람이 없다. 오롯이 우리 부부가 감당해야 한다.
아내는 2주 전부터 프리랜서로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를 위해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을 찾았다. 아내는 아이도 돌보고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아이가 잘 때 아내가 일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아이는 하루 종일 엄마 손이 필요했다. 아내는 앉아서 밥 먹을 여유조차 없었다.
아내는 낮에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본 뒤, 내가 퇴근한 후에야 숨을 돌렸다. 하지만 저녁에 잠깐 일하는 걸로는 원고 마감일을 지킬 수 없었다. 체력은 떨어지고 잠은 부족한 날들이 이어졌다. 마감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아내는 결국 내게 하루만 휴가를 내고 아이를 봐달라고 했다.
그때 내 대답은 “어려운데…”였다.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단 걸 알았지만, 회사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그날 아내는 울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고, 책임감을 느끼는지 알아요. 그런데 나는 마감일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육아도 함께하고 일하는 것도 도와준다고 해놓고선 결국 나만 동동거리고 있잖아요."
아차 싶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육아를 열심히 돕는 남편’이라 자처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난 급하게 며칠의 휴가를 냈고, 아내는 서둘러 원고를 마감했다. 아내는 지금까지 마감 날짜를 어긴 적이 없다. 원고에 대한 평가도 좋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출판사에서 한 소리를 들은 뒤, 아내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못 다한 일이 머릿속을 맴돌고, 일을 하고 있으면 좀 더 안아주지 못해 아이에게 미안하고. 도대체 이게 뭔지…. 내가 일을 너무 빨리 시작했나봐요…."
나는 지금껏 세상의 수많은 원더우먼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더우먼들은 속으로 속울음을 삼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엄마들에게 왜 원더우먼이 되지 못하냐고 다그친다. 나도 내 아내가 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하는 원더우먼이 되길 바랐다. 생각이 짧았다. 아내에게 약속해야겠다. 곧 슈퍼맨이 우리 집에 날아들 거라고.
- 2015년 3월 30일 아빠가
브런치가 생기기 전, 티스토리에 썼던 봄이네 육아일기(0~29편)를 이곳 브런치에 옮겨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