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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Nov 23. 2017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모든 속도는 슬프다.

부르고스부터 오르니요스까지 | 24km

간밤에 신부님이 순례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시는지, 건물 주변에 불빛을 비추며 주위를 뱅뱅 도시는걸 목격했다.  여기서 한번 더 감동을 했다. 정말 진심으로 순례자들의 안녕을 빌어주는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아침을 다같이 먹고, 기도이후 출발. 영어, 스페인어, 심지어 한국어버전으로까지 기도를 했다. 역시 한국사람이 많긴 한가보다.

굳세게 마음을 가지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굳세게 가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못하고 있지.

오늘은 좀 늦게 출발하기로 했다. 천천히 가고싶었고, 유심도 사야하고, 그리고 그냥 뭔가 해가 뜨지않았을때 걷기도 싫었다. 오늘목표는 원래 한마을만 가기. 12km

그래서 유심을 사러 들렸는데 s8을 한달 10 유로에 파는 프로모션을 하고있었다. 유럽은 폰이 비싼데 괜찮은 프로모션같다. 한국도 좀 했으면..


통신사가 10시에 열어서 유심을 사고 출발하려고 보니 10시 30분이다. 이제 서둘러 출발했다.

부르고스 시내의 순례길은 이때까지 만났던 대도시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길찾기가 쉬웠다.

길가다가 스페인의 가장 저렴한 대형마트. ‘MERCADONA’에 들러 황금복숭아를 샀다. 이게 정확한 이름이 황금복숭아는 아닌데, 난 스페인에서 이걸 처음봤고 너무 맛있어서 그냥 내가 지었다. 맞을려나? 너무너무 맛있으니 스페인 가는분들은 꼭 가보길바란다. 근데 이때도 점점 시즌이 끝나가서 마트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가격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 8-9월이 제철인듯 했다.

아직 시내를 빠져나가지 않았는데 순례길이 점점 자연으로 안내한다. 지도를 보니 여긴 공원. 순례길이 공원을 지나가는 것도 신기한데 이 공원을 자주 느낄수 있는 부르고스의 시민들이 부러웠다. 이정도면 남이섬 메타세콰이어길 부럽지 않네.

슬슬 도시를 빠져나오니, 이제 나를 맞이하는건 황량한 고원, 초원위에 직선으로 쭉뻗어버린, 한치의 흐트림도 없거니와, 소실점이 살아있는 그런 도로.

중간에 들린 Tardajos라는 마을,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원래 성당문을 열지않는건지, 굳게닫힌 문에 내 마음도 굳게 닫고 쉬지않고 걸었다. 왜 문을 닫아 놓은걸까. 폐쇄 한걸까...

열심히 걷다보니 결국 출발한지 네시간만에 24km 지점인 Hornillos del camino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즉 시속 6km/h 로 걸었다. 평소에 절대 날 속도가 아닌데 오늘따라 왜 그렇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더 갈까 했는데 가까스로 내 마음을 붙잡았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오르니요스에는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Neson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여기서 저녁을 먹어보려고 했다. 인사도 드릴겸. 오픈시간은 4:30 PM. 일단 쉬었다가 저녁에 오는걸로.

공립알베르게에 묵었는데, 와이파이가 되지않아 근처 사설알베르게에 들어가 콜라를 하나 사먹으며 와이파이를 쓰고있었다. 그런데 알베르게 주인이 나보고 파스타를 만들건데 같이먹자고 했다. 여기 묵고있는게 아니라고 했더니 하는말.

음식을 남기는건 신에게 용서받을수 없어.
여기서 묵지않으면 어때, 같이먹자

결국 그들의 은혜를 받들어 진짜 Real 파스타를 먹게 됬다. 내가 아는 파스타는 그저 토마토 소스를 사서 만드는것인데, 진짜 토마토를 데쳐 껍질을 벗기고, 직접 소스를 만들던 그들의 정성에 감동했다. 파스타는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그들과 더 놀고싶었는데, 오르니요스까지 왔으니 Neson 식당에 꼭 가보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다. 어쩌다보니 저녁만 두끼를.

한글메뉴도 있지만, 한국사장님은 다른데로 떠나셨다고 한다. 아쉽게도 인사는 드리지못하고, 양념갈비같은걸 주문했는데 전혀 한국식은 아니었다. 이제 neson에 한국사장님이 없어서 그런가 싶다. 직원들은 매우 친절했으니 가볼만은 하지만..

직원의 아이로 보이는 아이와 신나게 놀아주었다. 여행하다보면 아이들이 왜이렇게 나를 좋아하는지.


오늘은 그래도 조금만 걸었는데. 이 속도보다 조금만 더 늦게 걸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을 해본다. 속도는 어쩌면 슬픈거니까.

돌아보면
모든 속도가
슬프다.
<김주대 시집 - 꽃이 너를 지운다 中 슬픈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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