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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Nov 25. 2017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첫 비

오르니요스부터 보아디야까지 | 39km

오늘 비 소식이 있어 일찍부터 걸었다. 비를 처음 맞이하는 것이긴 하지만, 비를 맞아봤자 좋을 건 없다는 생각에, 비가 올 때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비가 올 예상시간은 오후 두 시.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아침에는 참 많은 생각을 한다. 춥다. 배고프다. 라면 먹고 싶다. 오뎅국물, 집에는 언제 가지, 순례길 다음엔 어디 가지, 카드는 언제쯤 받을까, 지갑도 사야겠네. 노트북은 언제 사지? 여행 중에 또 큰일이 있으면 어떡해, 아니 없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곧장 사라지곤 한다. 생각을 버리려고 트레킹을 하는데 트레킹이 길어지니까 다시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인간 중심적'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생각은 인간과 절대 동떨어져 놓을 수 없는 관계이긴 한가보다.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며 걷는다.


아침을 먹지 않는 날은 일찍 출발하게 되는데, 해가 뜰 때쯤이면 항상 배가 고프다. 엄연히 자연의 이치 이는지 모르겠지만 전날 밤 삶아놓았던 계란을 꺼내서 까 보는데, 아차차. 이번에도 대박 잘 삶았구나. 내가 삶았지만 참 맛있는 계란이었다. 마치 한국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감동란" 뺨을 칠 만큼.

부르고스에서 헤어졌던 분들이 묵었다던 혼타나스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도착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던 도시. 산과 산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라 사방에 벽을 친 듯 답답했기에 빨리 더 걸었다. 산티아고까지 반도 걷지 못했다 싶은데, 또 지금까지 어떻게 걸었나 싶고,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단순히 20km씩 계산해도 이제 23일밖에 걷지 못한다. 이런,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혼타나스를 지나서 걷다 보면 이런 마을의 입구에 있을법한 문이 나타난다. 약간 중세시대의 성벽을 보는 듯하기도 하고, 실제 성벽은 아닌 것 같고 성당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비가 올 예정이라 비가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가야 해서 포기했다.

혼타나스에서 10km만 더 걸으면 카스트로헤리즈 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언덕 위의 성당에서 노을을 보면 분위기가 좋다고 해서 원래는 이 마을까지만 걸으려고 했다. 그래도 오르니요스부터 22km이니까, 그런데 너무 일찍 마을에 도착하고 말았다. 10시 30분에 도착했으니 열려있는 공립 알베르게는 당연히 없을 것이고, 비수기라 사립 알베르게도 몇 없었다. 다행인 건 한국인이 운영한다던 오리온 알베르게가 열려있어 점심을 대체하고자 라면정식(?)을 하나 먹고, 다시 걷기로 했다. 속도 조절은 참 힘들다.

부르고스 이후부터 사진 찍기가 죄다 재미가 없다. 황야 위에 펼쳐진 이 길들 밖에 없기 때문에. 뭐랄까, 사람도 많이 없는 데다가 길마저 심심하니 그냥 점프할까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이 길을 빨리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 점프는 안 하기로 했는데, 길이 너무 심심하니 걷는 게 지루했다.

카스트로헤리즈 앞에 언덕을 넘고 나니 보였던 쉼터, 그리고 다시 펼쳐진 내리막과 드넓은 고원. 삭막한 풍경이지만 나는 왜 이렇게 좋은지 몰라. 그래서 라다크가 좋았던 거겠지. 라다크, 그리고 티베트. 다시 가야 할 곳. 다시 가야만 할 곳. 다시 가고 싶다. (아무 말 대잔치) 

걷다가 보니 원래 순례길이랑은 조금 다른 길로 보아디야까지 가는 길, 그리고 원래 순례길로 돌아가는 길이 나왔는데, 원래 순례길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였기에 혼자 걸으려고 다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 약 1~2km 정도 더 가깝지만, 아무도 없어 고독히 걷기 좋았다. 걷다가 80/90년대 음악, 트로트, 락, 발라드, 힙합 등 장르 무관하게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갔다. 누가 들은 사람은 없겠지

계속 천천히 걷자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는데, 천천히 걷자는 강박을 놓으니 결국엔 39km를 걷고 말았다. 주인을 잘못 만난 내 발은 무슨 죄, 사실 중간에 발이 아파서 히치하이킹도 하고 싶었던 완전 직선의 도로구간도 많았는데, 어차피 지나가는 차가 전부 농기계라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던 슬픈 길이다. 나 참.

보아디야에 도착해서 그전에 부르고스에서 헤어졌던 일행들을 만났다. 만나니까 또 얼마나 반가운지, 그 많은 거리를 걸어온 보람이 있구나. 심지어 이 마을엔 마트가 없어서 전 마을에서 식재료까지 사 왔다고 했다. 덕분에 포식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마을에 유일하게 키친이 있는 숙소가 비수기라 문을 닫았다. 그래서 결국 순례자 메뉴를 먹기로 했다. 처음에는 순례자 메뉴가 진짜 풍부하고 좋은 메뉴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먹을 게 없을 때 먹게 되는 메뉴가 돼버렸다. 뭔가 냉장고에 남는 재료들로 만들어 주는 느낌이라 별로 좋진 않은데, 선택지가 아무래도 없구나.

묵었던 숙소에서 운영하는 순례자 메뉴를 먹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메인 코스는 Beef with Tomato salad.  그래도 여기는 와인 인심이 좋아서 많이 먹었다. 빨간 수프가 Beef Soup이고 노란 수프가 Chicken Soup인데 개인적으론 빨간 수프가 맛있었다.


만찬을 즐기고 바깥에 잠깐 나가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례길을 걷고 맞는 첫 비다. 이때까지 날씨의 행운이 작용한 것인지, 날씨가 너무 좋았는데 드디어 비를 맞아본다. 날씨 애플리케이션 상에는 내일까지는 비가 오는 걸로 되어있으니 내일은 아마 비를 맞고 가야겠다 싶다. 그런데 비가 오는 게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첫 비라서 그런가? 하긴 첫 비에 의미를 두기는 처음이다. 오늘은 기념해야겠다. 첫눈은 기념해도, 첫 비는 기념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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