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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Nov 30. 2017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함깨

보아디야에서 까리온까지 | 25km

비가 내린다.


비가 내려도, 우리는 걸어야 한다.


새벽 6시 30분, 우리는 어둠을 뚫고 출발했다. 까리온이라는 마을을 향해.

안개가 가득한 이른 아침, 해는 저 멀리 떠오르고 있는데 마을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럽에 와서 가장 놀란 것 둘 중 하나는 바를 제외하면, 가게들이 아침 일찍 열지 않는다는 것, 인도나 네팔에서는 새벽같이 문을 열던 가게 주인들과, 아침부터 수다를 떨며 빵을 사고, 음료수를 사던기억이 있는데 유럽은 그게 쉽지가 않다. 깨어나려면 아직 멀었다. 뭐, 이게 나쁜 거라는 건 아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1시간쯤 걷다 보니 동키 혼자 길에 나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라다크에서 만났던 동키가 자꾸 생각이 나는데, 이 친구의 뒤태또한 비슷하게 생겼다. 주인이 없는 동키는 아닌 것 같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주인이 다가와서 갑자기 올라탔다. 

갑자기 올라타서는 자기가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우리도 결국 그 동키를 따라 들어갔으니, 마케팅 성공인 셈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 카페에 들어간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가게 안에는 피아노도 있었고, 기타도 있었으며, 한량들의 놀이터였다. 우리는 단시간만에 함께 그 카페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오랜만에 에피톤 프로젝트 - 봄날 벚꽃 그리고 너를 쳐보았다. 피아노의 조율이 잘되어 있는 편은 아니라서 치기는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피아노를 만져봐서 좋았다. K형도 기타를 쳤는데, 프라이버시 상 올리지는 않겠다. 여긴 내 공간이니까.


열심히 놀다 보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버렸다. 빨리 도착하기로 했었는데 이렇게 한량처럼 놀다니. 처음엔 후회를 했으나 생각해보면 잘한 선택이었다. 빠른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얻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걸었다.


재 배송을 신청한 카드가 곧 도착 예정이어서, 다시 카드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던 날이었다. DHL은 진짜 빠르다. 단지 비쌀 뿐, 그래도 이 카드만 찾으면 대부분은 정상적으로 여행을 할 수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자.

그런데 문제는, 끝없이 걷고 걸어도 마을이 안 나온다. 우리는, 이 모든 지루함을 노래로 승화시켜 부르기로 했다. 80년대, 90년대, 00년대, 힙합/R&B, 영화 OST, 발라드, 댄스 등 장르를 무관하고 한 시간 동안이나 목청껏 노래를 불렀고, 점점 레퍼토리가 떨어져 갈 즈음 까리온에 도착했다.


까리온은 생각외로 큰 마을이었다. 우리가 항상 마을에 들리면 찾던 마트도 있었으며, 성당도, 광장도 온전히 있었다. 이곳은 까미노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제와 같이 우리는 모였다.

내일 또 흩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저녁은 만찬을 해먹기로 했다. 메뉴는 삼겹살과 참치마요, 치킨마요.

호텔에서 요리사를 했다던 Y누나를 필두로, 다같이 준비했다. 

사실 여행은 별거 없다.


좋았던 곳, 좋았던 추억, 좋았던 장면은 전부 "함께"하는 사람 으로 귀결되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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