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빴을 뿐이고,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으로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도... 아프다
-응답하라 1988중-
시어머니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건 남편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스무 살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한 순간에 일어난 그 사고는 어머님과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24여 년이 흘러
어머님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I며느리 눈에 '어머님은 E이시구나' 할 만큼 활동적으로 생활하신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어머님을 보살핀 아버님이 계신다. 당신은 그게 당연하다고 하실 거다.
이렇게라도 어머님이 살아 계신 건 너희에게 이불이라고 거듭 말씀하신 걸 나는 기억한다. 그 나지막한 음성에는 한치의 가식도 없었기에 아버님의 진심이 느껴졌다.
새벽마다 한두 번은 일어나 어머님 자리를 다시 봐드리며 그렇게 24년의 낮과 밤을 보내셨다.
아버님은 적어도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어머님께 짜증을 내거나 원망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다. 그것만으로 나는 늘 아버님을 존경했다.
큰 어른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아랫사람을 가르친다.
어머님은 때로 아버님 흉을 보셨지만 험담으로 와닿지 않은 것은 사람은 직접 보고 느끼는 게 먼저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 말해도 내가 보고 겪은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그것 또한 와닿을 수 없다.
아버님은 묵묵히, 때론 아내에 대한 표현도 아끼지 않으시며 그렇게 긴 시간을 어머님 곁을 지키셨다.
그런 아버님이 편찮으시다.
몇 해 전에도 쓰러지신 적이 있지만 잘 이겨내신 아버님이셔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다르시다. 찾아뵐 때마다 아버님은 수척해지고 고통을 표현하신다.
그러시면서도 본인보다 어머님 걱정을 하신다.
어머님 안부를 재차 묻고 잘 지내신다고 답하면,
순간 주름진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친다.
그렇게 습관처럼 어머님을 걱정하신다. 그러고 보면 그게 아버님의 삶이고 굳은살처럼 벤 습관이리라..
아버님은 편찮으신 와중에도 계속해서 어머님을 잘 살펴달라는 의미의 말씀들과 자식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말씀하신다.
"90세까지 살아서 내가 너희 엄마 묻고 가야 하는데" 늘 하시는 그 말씀조차도 자식 걱정, 부인 걱정 때문이리라. 이번에도 빼놓지 않으셨다. 거기에 덧붙인 한 마디는 "나는 지금 죽어도 괜찮다.."
당신 몸도 못 가눈 채 누워 계시면서도 그런 걱정만 하시는 아버님 손을 잡고 말씀드렸다.
오랜 시간 애써주신 아버님 덕분에 자식들이 편하게 지냈으니 이제는 당신 걱정만 하시라
여태껏 해보지 않으셔서 일까
힘없이 고개만 끄덕이실 뿐이었다.
또 오겠다 인사드리는 내게 "와줘서 고맙다 미안하다" 하시는데 왈칵 눈물이 솟구치는걸 간신히 참고 뭐가 미안하시냐 그러지 마시라니
"자식이니까 미안하지"라고 하셨다.
그 한마디에 나는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나도 한 아이의 엄마이기에 그 한 문장의 깊이가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래, 자식이니까..
그게 자식이란 존재더라..
손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아버님의 한 끼를 챙겨 드리려고 전복죽을 포장해 남편과 들른 날,
얼마나 맛있게 드시던지 수술도 잘 이겨내실 거라고, 근심이 짙어져 가는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불같이 강한 성격이지만 편찮으신 아버지를 살갑고 따듯하게 보살핀다.
한 마디 한 마디 따듯한 말을 건네고 주치의에게 들은 병과 수반되는 통증, 수술의 과정과 수술 후 회복 과정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고 수술이 끝나면 지금의 통증이 해소될 거라는 것과 뭐든 훨씬 좋아지실 거라고 자식을 다독이는 아빠처럼 그렇게 아버지를 다독이듯 이야기한다.
나와는 참 다른 성격의 거친 남자와 오랜 세월 변치 않고 살고 있는 이유는 아마 이런 모습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수술이 잘못될까 봐 걱정인 남편은 아버지가 떠나면 너무 슬플 것 같다고 했다.
긴 세월 아내의 간병으로 당신 몸을 돌볼 여력은 없으셨을, 몸이 아프고 보니 남은 기력마저 쇠한 상태가 된 아버지..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내걱정, 자식걱정 손주생각이 먼저인 어른..
이제는 당신 몸만 생각하시기를
여든네 살의 아버지, 많이 애쓰셨어요.
자식들이 아버님만큼 어머니께 해드릴 수는 없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님께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우리 모두에게 남은 각자의 시간이 얼마인지,
그 누구도 알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계신 당신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할게요.
그리고 오늘, 수술도 무사히 잘 받으셨으니 이제 회복 잘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남겨봅니다.
늘 부족한 며느리와 자식을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