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나는 나이든 나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8화 제주도 예행연습

by 박시원

제주도 예행연습

어제도 오늘도 눈이 쉬지 않고 내렸다. 마을은 어느새 새하얀 눈에 파묻혔다.

“오늘은 운동 못하겠네요.”

“무슨 소리야? 당연히 해야지.”

“밖에 눈 쌓인 거 봐요. 발 푹푹 빠져서 양말 다 젖을 테고 그러면 동상 걸리기 아주 적합한 환경이 되는 거죠.”

“웬일이래, 자신의 몸을 아낄 줄도 알고."

사실 추운날씨와 미끄러운 빙판길 때문에 아주머니가 걱정이 되었다. 지난 달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에 아주머니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큰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지난 몇 달간 아주머니의 의욕은 엄청났다. 운동은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거르지 않았고 영어를 배우는 일도 열심히 했다.

나는 지금 아주머니가 하고 있는 것들이 단지 배낭여행을 위한 정상적인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삶의 끈을 잡고 있는 것처럼 한 가지 일에 미치도록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주머니의 삶을 유지 시켜주는 산소호흡기와 같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아주머니와 밖으로 나왔다.

며칠간 쌓인 눈은 내 발목까지 빠졌다.

"못가요. 눈이 너무 많이 쌓였어요."

"어느 길이던지 누군가 밝고 지나갔을 거야. 우리는 그 발자국을 따라 가면 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을걸."

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조금 더 걸으니 차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기껏해야 한두 대.

그래도 차의 무게로 눈을 눌러주어 평평해졌고 우리는 발이 빠지지는 않았다. 길 하나에 두 개의 평평한 눈길이 생겼다.

"아주머니는 이 길로 걸으세요. 저는 여기서 걸을게요."

온통 하얗게 변한 논바닥은 더 이상 황금들녘이 아니었다. 길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눈이 쌓여있었지만 전봇대만은 멀쩡하게 맨살을 보인 채 불쑥 나와 있었다.

"날씨가 꽤나 춥네요."

"여기가 서울 보다 추울 거야. 그나저나 저, 저 하늘을 좀 봐."

해가 이미 노을로 변해있었다. 하늘을 반으로 나누어 오른쪽은 붉은색 하늘 왼쪽은 새벽녘의 하늘처럼 푸른빛이 감돌았다.

언제나 걷는 길인데도 새로웠다.

세상 끝까지 뻗어있는 듯 길게 이어진 길, 그리고 주변은 온통 논뿐이었다. 멀리 보이는 불빛은 집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있었다. 하얀 세상에 유일하게 전봇대만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갑자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두 개 물어봐도 돼."

"네?"

"에이그. 그렇게 무뚝뚝하니까 아직까지 여자가 없지. 늙은 아줌마가 개그 한 걸 그렇게 못 알아들으면 어떡해. 그나저나 뭐가 궁금해?"

"이렇게 둘러보면 저 멀리 온통 산뿐이잖아요. 저기도, 여기도, 그리고 저기도. 그런데 왜 나는 한 번도 저산들을 가까이에서 본적이 없을까요?"

엄청나게 광활한 논밭으로 펼쳐진 이곳을 가만히 보면 저 멀리 있는 산들로 병풍삼아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산을 직접 마주 한 적이 없었다. 저 산들은 내게 신기루와 같았다. 보이지만 그곳에 없는 곳.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을 테고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는 거 아니겠어.”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던지는 아주머니의 말은 나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우리는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제주도 한번 가고 싶네.”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연습 삼아 제주도 한 번 다녀오세요.”

“나 혼자?”

나는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전 싫습니다.”

결국 나와 아주머니는 예행 연습차 제주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며칠 후, 나는 공항에서 아주머니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항까지는 혼자 스스로 무사히 도착한 아주머니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공항까지 무사히 찾아온 아주머니 때문이 아니라 짐 때문이었다.

“짐이 이게 다 뭡니까?”

가방 하나만 한쪽어깨에 메고 온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가방만 3개. 오래된 배낭 하나를 양어깨에 매고 있었고 크로스 백 하나, 그리고 허리에는 힙쌕을 당당히 옷 밖으로 차고 있었다.

“완전 아줌마 스타일이네요…….”

“나, 아줌마야.”

“아, 그건 그렇다 치고. 저것들은 다 뭐예요?”

나는 아주머니 손에 들려 있는 시장 가방을 가리켰다.

“이거야 뭐, 고추장, 된장, 또 그냥 반찬들이야.”

나는 장바구니 안을 살폈다. 검은 봉지로 꼼꼼히 포장했지만 냄새는 강하게 올라왔다.

“아주머니, 제주도 한국이에요. 외국 아니거든요. 굳이 이런 게 다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아줌마 무시하지 마. 나도 다 알아. 그래도 어디 집 반찬만 한 게 있겠어. 사먹는 건 다 조미료 넣고 몸에 안 좋아.”

죽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조미료가 몸에 얼마나 나쁜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했지만 일단은 아주머니의 물건들을 다 가져 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렵사리 음식을 사수하고 비행기를 탔다.

“아이고 답답해라.”

“걱정 마세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으니까. 그것보다 유럽은 12시간 이상 걸려요.”

“못해, 난 못해.”

“처음이라서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점착 익숙해질 거예요.”

비행기가 속력을 높이자 아주머니는 겁을 잔뜩 집어먹어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하세요. 비행기 추락 안 하거든요.”

“그거야 모르는 거지.”

사실 아주머니보다 더 떨고 있던 사람은 나였다. 내 상상 속에서는 이미 비행기가 이륙도중 폭발해 우리는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겨져 버렸다.

잠시 후

“아이고! 힘들어서 못 앉아있겠다.”

내가 붙잡을 틈도 없이 아주머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승무원이 달려와 빨리 앉으라고 말했다.

“답답해서 좀 걸으려고…….”

“손님 지금 착륙중이거든요. 위험하니까 앉으셔야 해요. 조금만 참아주시겠어요?”

승무원의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정말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빨리 앉으세요!”

당황한 내가 작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다그쳤다.

아주머니가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에 앉자 승무원이 직접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말했다.

“아드님과 여행 가시나 봐요.”

아주머니와 나는 당황해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승무원은 아름답게 웃으며 재빨리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비행기는 착륙했고 아주머니는 또다시 가슴에 손을 대고 힘들어했다.

“어디보자. 나랑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아주머니는 나의 머리를 이리저리 만졌다.

“이렇게 하면 못생기지는 않았는데.......머리 좀 예쁘게 깎아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조그만 비행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비행기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비행기에 문제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갑자기 놀라며 물었다.

“다들 빨리 나가려고 그러는 거예요.”

“뭐라고?”

내가 아는 아주머니는 점잖고 급하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우리도 빨리 나가야지! 얼른 옷 입고 나가자고. 어서, 어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아줌마는 아줌마다. 평온하던 아주머니는 갑작스레 급해졌다.

“아, 이놈의 빨리빨리.”

비행기에서 급하게 쫓기듯 내려 짐 찾는 곳까지 경주하듯 빠른 걸음으로 아주머니를 쫒아갔다.

“이거 봐요. 어차피 여기 와서 다 만나게 된다니까요. 빨리 나올 필요가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빨리 내려 빨리 가도 어차피 짐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여유를 가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또다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제주공항을 빠져 나왔다. 마치 남태평양의 한 섬에 도착한 것처럼 키가 큰 야자수 나무가 보였다.

“제주도가 이렇게 좋구먼. 개똥엄마가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정말 좋네.”

이제 막 제주도의 공기만 마셨을 뿐인데 아주머니의 제주도 예찬은 끝이지 않았다.

우리는 쉬운 길을 놔두고 조금 어려운 길을 가기로 했다. 흔한 렌터카를 하지 않고 버스 등을 타고 제주도를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아주머니가 스스로 결정하세요. 어디를 갈지, 어떻게 갈지. 우리는 예행연습 차 이곳을 온 거니까요. 야구선수들 겨울에 전지훈련 가듯이 우리도 훈련하러 왔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나왔다. 아주머니는 지도, 표지판 등은 전혀 보지 않은 채 무조건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기서 성산일출봉 가려면 몇 번 버스 타야해 학생?”

“여기 버스 번호 딱 쓰여 있잖아요.”

나는 버스 노선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물어보면 더 빠르잖아.”

“물론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이런 거 보는 법부터 익히셔야죠. 유럽 가서 한국에서처럼 물어 보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아이 몰러. 그냥 지금은 이렇게 하자고.”

아주머니의 깊은 짜증이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버스 맨 뒤 칸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창문 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젊은 남자, 젊은 여자, 나이든 사람들, 여행자도 있을 것이다.

아주머니 기사가 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문의를 해왔다. 사실 나는 많이 놀랐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테니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내게 말했다.

내가 그토록 찾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더 이상 사람들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돼 기뻐야 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기사를 통해서 주인공이 자살 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해석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비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아주머니에게 기사를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아주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내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꼭 기사를 썼어야 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떨쳐지지가 않았다. 아주머니는 원하지 않았는데 괜스레 내가 죽음을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아주머니는 보고 찾는 것보다 묻는 것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말려도 물어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일단 뒤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우리는 익숙한 관광지 위주로 돌아다녔다.

“카트 한번 탈래요?”

“왜 안 되겠어.”

우린 아이들처럼 카트도 탔다. 우리가 하는 것마다 아주머니는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었고 나또한 그랬다. 밥을 먹을 때도 우린 처음 먹어보는 것 투성이었다. 남들은 우리를 엄마와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 모시고 여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둥 남의 일에 이런저런 말을 하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앞에서 굳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하는 동안 모자지간으로 지내기로 했다.

반나절의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했다. 버스타고 숙소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아주머니의 물어보기 찬스가 실패 없는 지름길인 것은 확실 했으나 외국에 가서 사람들에게 지금처럼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숙소는 유스호스텔로 잡았다. 아무래도 외국인이 좀 섞여 있으면 아주머니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약한 방이 남녀 공용이었고 아주머니는 그 사실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8인실 방 안에는 서양인 3명, 중국인1명, 일본인2명이 있었다.

우리가 숙소에 들어섰을 때 젊은 호주 남성이 바지를 갈아입고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그 남자의 모습에 눈이 동그래졌다.

남자는 옷을 입다말고 ‘Hi' 라며 인사를 했지만 아주머니의 시선은 남자의 중요부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감 때문인지 아주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물론 자신감을 가질만했다.

“뭐하는 거예요?”

내가 들릴 듯 말듯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이. 하와유?”

“Good. you guys from korea?"

‘뭐야? 동사가 없는 거야? 쟤 호주 애잖아. 내 귀에 분명 그렇게 들렸는데…….’

아주머니는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다가가 배운 영어를 써먹었다.

나는 안중에 없었다. 그는 환한 미소로 보이며 여심을 녹였다.

특히나 두 명의 일본 여자애들은 아주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굽실거렸다. 그에게 ‘마이크루, 마이크루’ 하며 친한 척 했는데 알고 보니 호주남자의 이름이 마이클 이었다.

젊은 애들이나 아줌마나 잘생기고 몸 좋은 사람을 보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왜 남자가 여자의 겉모습만 보고 좋아한다고 욕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주머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외국인들과 잘 놀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사자들은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 같아보였다.

“1층 침대 쓰세요. 제가 2층 쓸게요.”

아주머니가 2층 침대를 쓰면 밑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운동능력이 좋지 않은 아주머니는 팔, 허리, 다리 모든 곳이 부러질 것이다.

목이 부러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싫어. 난 2층이 좋아.”

아주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불안했지만 2층 침대를 양보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어서 주무세요.”

“아이고 가만 있어봐. 쟤네들이 맥주 마시자는데 어떻게 그냥 자.”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밤 9시 반,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아줌마를 비롯한 외국인들은 식당에서 맥주파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피곤해서 먼저 자겠다고 들어왔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다시 낄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처음부터 못이기는 척 갈걸 그랬나.”

괜스레 죄 없는 아줌마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냥 못난 나를 탓하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피곤함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누군가 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면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이고, 벌써 자는 거야. 우리 윤재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쯧쯧…….”

아주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서로 민망한 순간을 피하려고 눈을 뜨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대략 10분정도가 흐른 것 같았다. 그사이 나는 또 깜박 졸고 말았다. 그리고 요상한 기분과 향기에 잠에서 깨어났다. 갑자기 맥주냄새가 아주 가까이에서 났기 때문이다. 나는 실눈을 뜨고 눈앞에 아직 아주머니가 있는지 보려고 했다. 그 순간, 다시 내 얼굴을 누군가 쓰다듬었다.

‘아줌마 가서 좀 자요!’

짜증스러움에 속으로 소리쳤지만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점점 더 쓰다듬고 있었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손길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손길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자는 척, ‘음, 음.’ 되며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려 했다.

그런데 몸이 오른쪽으로 돌아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팔을 살짝 움직여 보니 누군가 옆에 있었다.

아주머니가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 더 이상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눈을 떴다.

“어! 뭐야? 악!”

나는 흠칫 놀라 일어나며 머리를 침대 위에 박았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 호주 놈! 마이클이 내 옆에 누워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침대 밖으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들어와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아주머니도 드르렁 거리며 잠에 깊이 빠져있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다가 그냥 마이클 침대에 조심히 누웠다.

치즈 +양말 냄새가 합쳐진 그런 종류의 냄새가 났지만 어차피 마이클도 마늘냄새가 날 테니 참고 잤다.

아침에 마이클은 내게 사과를 했고 나는 쿨하게 받아줬다. 물론 속으로는 구시렁거렸지만.

마이클은 나중에 호주에 놀러 오라며 아주머니에 추파를 던졌다(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초대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여자라면 다 좋은 걸까?

마이클은 방에 있던 여자들의 연락처를 모두 다 가져갔다. 물론 나한테도 물어봤는데 그것은 아주머니가 메일 주소가 없다고 하자 물어본 것이기 때문에 정확히 순수한 의도로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아주머니와 나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우리뿐 아니라 숙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찍 나갔다.

그러고 보면 여행자들은 참 부지런하다.

“어? 왜 이렇게 짐이 줄었어요?”

내가 아주머니의 시장 가방을 들어보고 말했다.

“어제 애들 먹여봤지. 처음에는 매워 죽겠다고 난리더니 결국 아주 좋아하더라고. 어디 우리 음식만한 게 있겠어.”

“뭐예요? 나랑 먹으려고 가져온 거잖아요.”

“에이그. 여기도 다 있잖아, 김치도 있고 된장도 있고. 우리야 사먹으면 되지.”

나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어제와는 180도 달라진 아주머니의 태도, 나는 기분이 썩 좋지 많은 않았다.

우리는 성산일출봉도 올랐고 섭지코지도 방문했다. 그동안의 노력덕분인지 아주머니는 전혀 힘들어 하지 않았다.

“아줌마 여기가 어디에요?”

“여기서는 엄마라고 부르기로 했잖여.”

“그게 입에 잘 붙지 않네요.”

나는 엄마가 아주 오래전부터 없었기 때문에 엄마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아주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여행 중에는 엄마와 아들로 호칭을 정리했지만 나는 그냥 부르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아기가 어떤 단어를 말하기 위해서는 수백, 수천 번을 들어야 비로소 그 단어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나도 ‘엄마’ 라는 단어를 수없이 들어봤지만 그것을 내입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언어란 듣고 말로 표현 하는 것이지 듣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삶에는 ‘엄마’ 라는 단어가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영어 좀 많이 해보셨어요?”

“많이 했지. 아휴, 벌써 한국말이 잘 안된다니까.”

생각보다 잘 적응하는 아주머니에게 나는 내심 놀랐고 뿌듯했다.

“점심은 그 햄버거로 먹자고, 아메리칸 식으로다가.”

제주도 버스에서는 풍경을 맘껏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서울을 달리는 버스와는 다르게 귤나무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곳을 지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도로를 지나기도 했다. 어딜 가나 하늘은 푸르렀고 길가에 쌓아져 있는 돌담길들은 평범한 길조차 아기자기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밭에도 현무암등이 널려있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제주도에는 왜 이렇게 돌이 많은 거야?”

“그건 제주도가 화산섬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아주머니의 궁금증을 최대한 풀어주려 노력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메이즈랜드에 도착했다. 아주머니가 꼭 미로 찾기를 해보고 싶다는 요구 때문이었다.

“먼저 하고 들어가.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가야겠어.”

아주머니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햄버거를 먹고 배탈이 난 것이 분명했다.

나는 홀로 미로에 들어섰다. 첫 번째 미로는 피톤치드가 나온다는 바람미로였다. 서양측백나무로 미로가 구성되어 있었는데 걷다보니 그냥 출구가 나와 버렸다. 피톤치드를 제대로 쐬지도 못했는데 못내 아쉬웠다. 나는 바로 이어서 돌 미로에 들어섰다. 현무암으로 돌담을 높이 쌓아 눈앞에 길 이외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미로 보다 조금 어렵다고 했지만 어디든 돌다보면 길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0분을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30분, 40분, 미로 속에는 남자 1명, 커플, 나 이렇게 세 팀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 사라지고 나만 남아버렸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1시간이 넘을 무렵 또 다른 커플이 들어왔다.

나는 커플을 따라다닐까 생각했지만 여기서 그렇게 했다간 너무 티가 나기 때문에 우스운 꼴 당하지 않으려면 그냥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그때서야 나는 지도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나는 완전 까막눈 이었다. 지도를 이리보고 저리 봐도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지도에는 ‘출구를 찾지 못할시 전화하세요.’ 라고 적혀 있었지만 도저히 전화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1시간 30분이 지났다. 커플마저도 이미 나가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세요?”

“화장실. 배가 계속 아프네. 그 햄버거 어디상한 거 아니야? 근데 어디야? 나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니에요. 그냥 볼 일 보세요. 나오시면 연락주세요.”

태양 볕은 왜 그리도 강한지 어지러웠다.

그렇게 지도를 보며 찾기를 30분, 여전히 나는 같은 곳을 돌고 또 돌았다.

벌써 2시간이 넘었고 나는 지칠 대로 지쳐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구석에 주저앉아 전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하지만 통화버튼은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통화버튼을 누르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나는 손이 떨렸다.

“아, 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그 순간 어딘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 구나.”

나는 모든 걸 포기한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모두 끝났어요. 결국 나는 쪽팔림을 당하고 말거예요.”

잔인한 하늘은 너무나 맑았고 마침내 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나타나듯 구원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엄청나게 많은 구원자들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었다. 미로 속을 꽉 채우는 어마어마한 인원이었다.

나는 어리둥절 그들 틈에 섞여 버렸다.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 전화를 받았지만 나는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여보세요?’

나는 귀신에 홀린 듯 그들 무리에 섞여 몇 분도 안 돼 출구로 빠져 나왔다.

그들 중 누구도 길을 아는 이는 없어보였다. 누군가 리더가 돼서 전체를 이끌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 누구도 누가 리더인지 알 지 못했다.

자신들도 어떻게 밖으로 나가게 됐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리더는 다름 아닌 우리 모두였다.

만약 몇 명의 사람뿐이었다면 이렇게 쉽사리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인 나처럼 이곳을 헤맸을 것이다.

우리가 이곳을 쉽게 빠져나간 이유는 아마도 함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혼자를 고집했다. 그 누구와도 제대로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했을 때 어려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이 미로공원에서 알게 되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아주머니는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으세요?”

“여기서 매실차 한잔 마시니까 살 거 같네.”

“미로나 다녀오세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말했다.

“같이 가야지.”

“저는 충분합니다. 아주 충분해요.”

아주머니는 미로에 들어간 지 10분 만에 나왔다.

“돌 미로도 갔다 와야죠.”

“거기도 다녀왔지.”

“네? 어떻게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뭘 어떻게 다녀와. 걸어서 갔다 왔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그럼,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찾은 거예요?”

“아니. 지도 보고 찾아 나왔는데.”

학창시절에 나만 보면 툭툭 치고 놀리던 친구들이 있었다. 아무리 피해 다닌다고 해도 하루에 한 번쯤 꼭 마주쳤다.

나는 수업시간을 유독 좋아 했는데 공부하는 게 좋은 것 보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는 쉬는 시간 종이 칠 때면 나는 어떻게 하면 그 친구들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다.

종이치자마자 엎드려 자는 척 하기도 했고 선생님을 따라가며 질문하는 척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을 눈치 챘는지 내게 다가와 누군가 주먹을 날렸다.

마치 그때 준비 없이 맞았던 그 주먹을 또다시 맞은 거 같은 충격이었다.

“혼자요? 진짜 혼자요?”

“그래 그렇다니까. 지도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어. 왜 아들은 오래 걸렸어?”

“아니요. 저도 한 30분 정도…….”

아주머니의 신기한 재능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쩌다 한번 일어난 우연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지도를 보기 시작한 아주머니는 길을 기가 막히게 찾았다. 지도를 오랫동안 보지도 않고 한 번 보자마자 바로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찾아냈다.

나는 수없이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아주머니는 정말로 천재였다. 지도를 정말 잘 보는 천재.

가만 생각해보니 유럽배낭여행을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아주머니는 가지고 있었다. 지도도 잘보고, 길도 잘 찾고, 외국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붙임성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나이가 많다는 단점이 있지만 장점이 많기 때문에 문제없었다.

내가 지난 이틀 동안 겪은 아줌마의 진짜 모습이었다.

“정말 까면 깔수록 알 수 없네요.”

“누구, 나?”

“네.”

“꼭 말할 때 엄마라고 안하네. 왜 안 해? 하기로 했잖아.”

“아, 네. 해야죠. 해요.”

“한 번 해봐.”

“에이 왜 그러세요.”

“나한테 엄마라고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여?”

“아니에요. 할게요. 그나저나 정말 지도를 왜 이렇게 잘 보세요?”

“누구?”

“아시면서.”

“그니까 누구? 말해봐. 누구 말하는 거야.”

나는 먼 산을 한번 바라보고 숨을 길게 내 쉬었다.

“엄, 엄.......마. 됐죠!”

“하하. 그거 참 힘들게 하네. 지도 보는 거? 그거 그냥 보여. 지도를 들여다보면 그냥 저 앞에 길이 보이듯 보여.”

잘은 모르지만 아주머니는 나와 같은 사람과 다르게 지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천재란 그런 걸까? 자신도 모르게 태어날 때부터 몸에 자동 입력된 천재적 재능.

만약 아주머니가 자신의 능력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면 지금쯤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아주머니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행복할 수 있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모두다 능력자 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숨겨진 재능을 하나씩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했지만 그것이 특별난 재능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마치 지금의 아주머니처럼 말이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 또한 그 능력이 단순히 지도를 보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그보다 더 엄청난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능력이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나는 아직까지 나의 능력을 찾지 못했다.

“스쿠터요?”

아주머니의 황당한 제안이었다.

“사람들이 스쿠터 타고 보면 또 다르다고 그러네. 우린 이미 버스로 여행 해보았으니까 스쿠터로 갈아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도대체 누가 아주머니에게 바람을 넣었던 걸까? 아주머니는 남은 여행 동안 스쿠터를 타고 돌아보자고 했다.

“아직 춥잖아요. 아무리 여기가 제주도라도 아직 겨울이에요.”

“무슨 소리야? 이렇게 따뜻한데. 완전 여름이구먼 뭘.”

우리는 스쿠터를 빌려 거리로 나섰다. 나는 면허도 없었고 운전도 못했지만 놀랍게도 아주머니는 원동기 면허가 있었다.

“이런 건 언제 따셨어요?”

“시골에서는 면허 없어도 다 타는 겨. 개똥엄마도 면허 없어. 나는 신여성이었으니까 젊었을 때 따 놨지.”

아주머니는 자부심이 생기는지 은근슬쩍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나는 아주머니 뒤에 올라탔다.

“이, 이거 불안한데. 뒤에 사람 태워보셨어요?”

나는 불안한 마음에 발을 올리지 못하고 땅을 짚으며 언제라도 뛰어 내릴 준비를 했다.

“걱정하지 마, 항상 태우고 다녔어.”

잔뜩 얼어있는 나와 다르게 아주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했다.

부르릉.

시동이 걸렸다.

“자, 간다. 화이바 썼지?”

“썼어요. 조심해요. 안될 거 같으면 바로 세워.......어, 어!”

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토바이는 앞으로 달렸다.

“어때? 편안하지.”

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다. 나는 질끈 감은 눈을 가까스로 뜨며 말했다.

“불편해요! 천천히 가요!”

“이제 40km 여. 자, 달려보자고!”

우아아앙.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내달렸다.

시간이 흐르자 어느 정도 적응이 돼버려 그나마 가슴을 졸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있었다.

“아주 마음까지 시원하네. 저기 저 바다 좀 봐.”

아주머니가 오른쪽 바다를 보고 있었다.

“아줌마! 앞에 안보고 뭐해요!”

“아이고 깜짝이야. 걱정하지 마, 다 보고 있으니까.”

우리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웃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화이팅’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우리 모습이 평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쿠터는 버스보다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것을 몸으로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자연을 자연으로만 보았지 내 몸이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쿠터를 타고 달리다 보니 자연과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 참을 달리던 중 뒤에서 다섯 대의 스쿠터가 나타났다.

“멋있어요!”

“엄마 화이팅!”

“아들 우우우.”

어느 순간 그들과 우리는 한 팀처럼 계속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비자림 이었다.

500년 이상 된 비자나무들이 우거져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하니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스쿠터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비자림 숲으로 들어갔다.

공기가 상쾌했다.

아주머니는 비자에 대한 설명을 꼼꼼히 읽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엄청 좋은가봐. 눈을 밝게 하고 고혈압 예방도 되고 소화도 잘 되게 해준다네.”

“뭐, 그렇겠죠.”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벼락 맞은 비자나무도 있었고 요상하게 생긴 나무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에게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나무로 길을 잘 만들어놓은 곳을 걸어 들어가니 ‘둘이 만나 하나 된 연리목’ 이라는 나무가 가운데 떡하니 서서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나뭇가지들은 사방으로 고상한 자태를 뽐내며 뻗어 있었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정말 두 개가 껴안고 있네.”

“그러게요. 둘이 서로 정말 사랑했나 봐요.”

“저 두 나무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

“그거 모르세요?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모시던 양반의 딸을 사랑했던 노비가 있었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노비는 깊은 밤을 틈타 양반의 딸을 들쳐 업고 도망갔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잡혔지?”

“노비는 쉬지 않고 달리고 달려 아주멀리 까지 도망칠 수 있었어요. 목을 축이려고 연못에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자신의 얼굴이 비친 모습을 본거죠.”

“어떤 모습?”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녀를 보내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집으로 가지 않고 그를 계속 쫓아왔어요.”

“왜?”

“그녀도 그를 사랑했으니까요. 그렇게 둘은 다시 하나가 된 거죠.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결국 찾아냈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죽음을 맞이했고 영원히 사랑하자고 맹세했죠. 그렇게 둘은 나무가 되었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아, 그래? 슬픈 사랑이야기가 있었네.”

사실, 내가 지어낸 어설픈 사랑이야기에 아주머니는 믿는 눈치였고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주머니의 순수한 마음을 지켜 주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곳에 앉아 사진을 한 장씩 남기고 있을 때 젊은 여성 두 명이 도착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저희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나요?"

나는 두 소녀를 아름다운 연리목 앞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어? 아까 스쿠터 족?"

"네, 맞아요."

"근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 갔어?"

아주머니가 물었다.

"잘 몰라요. 일행 아니거든요."

어른을 어려워하는 앳된 외모의 여학생들 이었다.

"아이고, 하얘가지고 너무 예쁘네. 몇 살이나 먹었어?"

아주머니가 한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저희 나이 많아요."

그 소녀는 아주머니의 칭찬에 볼이 분홍색으로 변하며 수줍어했다.

큰 손수건을 목에 하나씩 걸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아마도 달릴 때 입을 가리는 용도로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긴 생머리에 매니큐어까지 여성의 아름다움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곳곳에서 이제 막 어른이 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두 명 다 바지는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신발은 편한 런닝화였다. 얼굴 하얗고 예쁘게 생긴 소녀는 아주머니처럼 힙쌕을 차고 있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같은 스타일이지만 아주머니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이마와 머리의 경계에 자라난 잔머리 때문인지 몰라도 소녀가 아니라고 하지만 소녀티가 나 보였다.

아주머니의 특별난 관심 때문인지 우리는 함께 걸었다.

"근데 아까 그 나무 탄생이야기 알아?"

아주머니는 갑자기 소녀에게 연리목에 대해 물었다.

"몰라요."

"어, 어. 저기 새천년 나무에요."

내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우리는 어느새 새천년 나무 앞에 와 있었다.

"이게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요?"

"몇 살인데?"

"무려 800살이래요. 새천년 나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 1일 밀레니엄을 기념해 그렇게 바꾼 거래요."

"똑똑하네. 어떻게 알았어?"

"아까 설명 봤죠."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느새 4명이 된 우리는 사진을 함께 찍고 이야기를 나눈 뒤 주차장으로 나왔다.

"손수건이나 마스크 없으세요?"

귀여운 소녀가 물었다.

"네, 없어요. 갑작스레 이렇게 돼서……."

"그럼, 이거 하세요."

소녀는 큰 손수건 두 개를 꺼내 나와 아주머니에게 주었다.

"괜찮아요."

"아이고 마음이 착하기도 하네. 고마워."

나는 예의상 한번쯤 거절하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덥석 받아 챙겼다.

"이거 안하면 목 아프고 감기 걸려요. 꼭하세요."

"그래, 그래. 고마워."

두 소녀는 스쿠터에 올라타 떠났다. 출발할 때 약간 갸우뚱 하는 모습이 우리와 비슷했다. 걱정 반 아쉬움 반이었다.

귀여운 소녀들.

“귀엽지?”

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결시켜주고 싶어도 너무 나이차가 많이 나네.”

“저요? 어휴, 그런 말씀 하지도 마세요. 어린애들이잖아요.”

“뭐 어때? 요새는 열 몇 살 차이나는 부부들도 많더만.”

“그럼 연결 시켜주지 그랬어요?”

내말에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더니 이내 피식하고 웃었다.

“뭐에요, 그 웃음은?”

“아니, 생각해보니 나이 차이를 떠나서 아저씨랑 애기를 어떻게 연결시켜줘.”

“뭐라고요? 내가 왜 아저씨에요? 외모만 이렇지 아직 젊은 나이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데 진짜 관심은 있던 거야?”

“전혀요. 내 스타일 아니에요.”

누군들 귀엽고 예쁜 여자를 싫어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녀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에 아니라고 말 한 것뿐이다.

우리도 뒤뚱거리며 출발했다.

잠시 후, 해가지고 어슴푸레한 저녁이 찾아왔지만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렸다.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뿐이었다. 단 스쿠터 한 대만이 길고 긴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차가운 밤공기를 몸을 움츠려 아주머니를 방패삼아 피했다.

“따뜻해요. 엄마…….”

“뭐라고? 잘 안 들려.”

“아니에요.”

제주도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제주도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한라산으로 향했다.

한라산 오르기 1시간째, 나는 헉헉 대며 가다 쉬다를 반복했다.

“그동안 운동한 거 다 어쩌고 이러는 거야?”

아주머니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동안 운동은 평지에서 했잖아요. 그리고 어제 설사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핑계 대지 말고 빨리 올라와.”

“저기 엄마.......먼저 올라가세요. 곧 따라갈게요.”

“그래. 그럼 쉬면서 천천히 올라와.”

인간은 왜 산을 오르는 걸까?

처음에는 힘들었고 시간이 지나자 짜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자 나는 궁금했다. 왜 산에 오르는 걸까?

여기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있다.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른다는 둥 누군가에게는 취미이고 누군가에게는 정복의 땅이고 누군가에게는 지옥이다.

나에게는 지옥이다.

신발은 미끄러워 걷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어차피 내려올 텐데 뭐 하러 올라가는 걸까?’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올라갈까, 아니면 내려갈까. 마음은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주머니와 올라가기로 약속했으니 일단은 가보는 대까지 가보기로 했다.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앉아있어?”

등산로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날 보고 한 아저씨가 말했다.

“힘들어서요.”

아저씨는 내 옆에 앉더니 초콜릿 바를 두 개 꺼내 하나는 나를 주었다.

“힘들면 쉬었다 가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무리하면 안 되지. 그렇다고 올라가는 걸 포기하면 안 돼?”

“아, 네. 그런데 계속 오르막만 있나요?”

나는 애써 괜찮다고 말했지만 움찔했다. 아저씨는 다시 일어나 옷과 신발을 체크했다.

“그럼 나는 이만. 어디 계속 오르막만 있겠어. 가다보면 내리막도 나올 테니 계속 힘을 내도록 해요.”

나는 왜 내리막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당연히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겠지만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오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느꼈을 때 나는 이미 산을 오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먹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1시간여를 오르자 정상이 나타났다.

“후, 아.”

“수고했어.”

뒤에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빨리도 올라오셨네요.”

“말했잖아. 체력이 남아돈다니까. 하하.”

역시 아줌마의 힘은 상상을 넘어선다.

우리는 산을 내려갔다. 쉽지는 않았지만 올라오는 것보다 쉬웠다.

그리고 힘들면 쉬었다. 그러자 어느새 평평한 땅이 나왔다.

너무나 그리웠던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뭉클해졌다.

뜨끈한 해장국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주머니의 어깨에 기대는 게 단 하루 만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한림공원 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있었다. 그 옆으로 스쿠터 한 대가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핑크색 스쿠터.

표를 끊고 공원으로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긴. 아들이나 보약 좀 먹어야겠어.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거야.”

내가 묻고도 한심했다. 지금까지 누가 봐도 빌빌거렸던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자수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엄마와 아들 사이가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새 아주머니도 나에게 마음을 열었고 나 역시 아주머니에게 마음을 열었다.

전혀 친구가 될 것 같지 않은 우리 둘은 이미 친구가 되어버린 듯 했다.

야자수 길, 산야초원, 협재굴 쌍용굴, 제주석 분재원, 재암민속마을, 사파리조류원, 재암수석관, 연못정원, 아열대 식물원 총 9가지 테마로 꾸며놓은 한림공원은 엄청난 크기와 각기 다른 수많은 식물들이 놀라움을 줬다.

“정말 오밀조밀하게 잘 만들었네.”

“1971년 재암 송봉규 선생이 10만평 황무지에 씨앗을 뿌려 가꾸어 놓기 시작하면서 역사가 시작 된 거라고 하네요.”

“어디가면 항상 그런 것부터 보고 공부하는 겨? 난 그런 게 어디 쓰여 있는지 보지도 못했는데.”

“아니 뭐, 어쩌다가 본 거에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아닌 척 했지만 사실은 아주머니에게 말해주고 싶어 일부러 알아 두었던 것이다.

아주머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사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스쿠터를 비롯해 아주머니가 이 여행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공원이 워낙에 넓어 걷다보면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를 때가 많았다. 우리는 잠시 쉴 겸 벤치에 앉았다.

옆자리에 젊은 남자가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 오셨나보네.”

역시나 아줌마가 참지 못하고 말문을 뗐다. 옆에 누군가 보이면 잠시도 참지 못하고 말을 시켰다.

“네.”

머리위에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었고 회색 후드티, 회색 청바지 차림의 청년이었다. 손에는 점퍼가 들려있었다. 나이는 20대 중 후반으로 보였다.

“아이고, 어쩌다가 혼자 왔어요?”

‘아줌마 어쩌다가 혼자 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정말 말리고 싶었다.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야 해서요.”

“아, 그렇구나. 누 구?”

‘아줌마!’

“미래의 여자 친구요.”

“아이고! 정말?”

“아, 농담이에요.”

“농담 같지 않고만 뭘.”

그는 그저 웃었다.

“그런데 요기 우리아들하고 닮은 거 같네.”

‘또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그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내밀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를 본 듯한 느낌. 그는 정말로 과거의 나와 닮아있었다.

찢어진 눈, 적당히 높은 코, 무표정한 얼굴. 머리스타일은 완전히 달랐지만 우린 너무 비슷했다. 마치 잃어버린 나의 한 부분처럼…….

“반가워요…….”

그가 어색하게 손을 내밀고 내게 악수를 청했다.

“이거 봐. 비슷하잖아.”

아주머니는 신기하다면서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세상에 나와 닮은 사람을 직접 마주치는 기분은 정말로 오묘했다.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기쁘지도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

“그럼 저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그가 먼저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의 말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나와 비슷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나는 또 다른 내가 지구 어딘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만 이런 식으로 나와 마주치게 될지 생각지 않았다.

지구가 아닌 우주의 다른 행성 같은 곳에 있으면 있을까, 지구는 그러기에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나 그가 또 다른 나라면(그럴 리야 없겠지만) 지금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정말 닮았다.”

아주머니는 뚫어져라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닮긴 뭐가 닮아요. 딱 봐 봐요. 내 코가 더 높고 눈도 내가 더 크지.”

“솔직히 우리 아들보다 잘생겼지.”

망할 솔직함.

“에이, 말도 안 돼. 어쨌거나 비슷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죠.”

우리도 일어나 다시 구경을 시작했다.

“어? 아이고 반가워라! 여기서 또 만나네!”

아주머니의 격한 반응에 나는 뒤를 돌아 봤다.

“어?”

나 역시 깜짝 놀랐다. 어제 비자림에서 보았던 두 소녀가 보였다.

그 소녀를 보는 순간 입안에서 상큼한 사탕이 마구 터지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두 소녀 역시 신기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왔어?”

또다시 아줌마의 엉뚱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스쿠터 타고 왔겠죠.”

내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말 신기해요.”

소녀들도 신기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웃었다.

“그러게 이것도 정말 인연이네.”

아주머니는 소녀들과 연신 수다를 떨며 함께 걸었다. 결국 나는 한 발짝 뒤로 밀려나 버렸다.

가끔 소녀들이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며 실실 웃어댔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주머니가 다른 소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쁜 소녀는 자연스레 내 옆으로 왔다.

"제주도 처음이세요?"

그녀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내게 물었다.

"네, 처음이에요. 처음이세요?"

"네, 저도 처음이에요."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침묵.

"저 어제 신기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녀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나는 소녀의 하얀 볼을 한 번 만지고 싶은 순수함과 변태적 본능 사이의 욕구에 사로잡혔다.

"어떤 일이요?"

"저랑 되게 비슷한 여자를 봤어요."

"아, 정말요? 저도 아까 저와 엄청 닮은 사람을 봤거든요."

"진짜요? 와, 신기하다."

"그러게요. 그래서 대화라도 해봤어요?"

"아니요. 그냥 멀리서 보고 겁나서 도망 왔어요. 헤헤."

"말이라도 먼저 걸어보지 그랬어요."

"지금은 조금후회가 되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긴 한데……."

"저도 묻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겁이 났는지 휙 가버리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삶은 살고 있겠죠?"

"어쩌면 우리가 두 갈래 길에 서 있을 때 다른 길을 선택한 또 다른 우리 자신일수도 있을 거 같아요. 평행우주처럼 말이죠."

그녀가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카리브해 바다처럼 너무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ANOTHER EARTH 라는 영화가 있어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나는 게 되는 내용. 혹시 다른 내 자신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말하고 싶어요?"

내 질문이 사실 다소 유치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진지하게 생각 했다.

“영화에서는 만나서 뭐라고 해요?”

“영화에서는 만나는 순간 끝나요.”

“아, 그러면 나는 음.......물론 놀라겠죠. 하지만 지금 이런 이야기를 했으니까, 조금은 덜 놀라겠죠. 저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거 같아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유레카!”

밝고 명랑한 어린 소녀다운 답변이었다.

나라면 우울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어느새 그녀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린 소녀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말이 잘 통했다.

알고 보니 나와 많은 나이차가 나지 않았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도 있는 7살 차이가 났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먹었다는 밥을 굳이 사주겠다며 아주머니가 앞장섰다.

"남자 친구는 있어?"

아주머니의 너무 속이 빤히 들어다 보이는 표정과 말투였다.

"얘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옆에 다른 땅딸보 소녀가 대신 대답했다. 어여쁜 소녀는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해 했다.

"아이고! 그랬구나."

아주머니가 너무나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시점에서 나를 보면 어떡해요!'

나는 갑자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 했다.

"근데, 얘 다음 달에 유학가요."

아주머니의 급 실망한 표정.

"아이고, 머나먼 나라 가서 고생하겠네. 어느 나라로 가는 거야?"

나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부끄러움에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 그 모습으로 저 어린애를 넘본 거니?'

나는 괜스레 내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

나이차도 나이차지만 내 모습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아주머니도 포기했는지 더 이상 그녀와 나를 엮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왜 편한 것을 놔두고 굳이 위험한 스쿠터를 선택했는지, 제주도는 어디가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가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재빨리 눈을 피하고 애꿎은 물만 홀짝 대며 마셨다.

그녀는 아주머니의 어떤 말에도 배시시 웃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마치 그 블랙홀 같은 웃음에 빠져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블랙홀이라면 수백 번도 더 빠질 수 있을 테지만…….

우리는 이제 공항으로 가야했기에 소녀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항상 조심조심 운전하고 남은 여행 잘하고. 또 인연이 되면 볼 날이 있겠지."

아주머니는 마치 엄마처럼 어린 소녀들에게 진심어린 말을 해주었다.

"이 오빠 연락처라도 알려 줄까?"

아주머니의 갑작스런 돌발행동.

소녀들은 가만히 있었다.

'이런!'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창피함에 견딜 수 없었다.

누가 내 연락처를 원할까?

눈치 없는 아주머니가 너무 미웠다. 내 자존심은 생각지도 않고. 나는 한 남자로써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다.

예쁜 소녀가 땅딸보 소녀에게 툭툭 치며 예의상 받으라는 표정을 보냈지만 땅딸보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작별인사를 했다.

"제가 유학을 가야해서……."

그녀가 너무나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인연이 되면 언젠가 만날 수도 있겠지. 그때 만나면 이 오빠랑 한 번 사귀어봐. 알고 보면 아주 좋은 사람이야."

예쁜 소녀는 얼굴이 또다시 뻘게지며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싫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착해서 그런 말을 못한 것일 가능성이 다분했지만.

아주머니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서둘러 정리했다. 내게 우연은 아마도 한번뿐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우연 혹은 인연은 없다.

두 사람은 핑크색 스쿠터를 타고 헬멧도 쓰고 다시 휘청거리며 어디론가 떠났다.

우리는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왜 그런 말을 하셨어요. 나만 바보 됐잖아요."

"뭐가? 또 만날 수 있지. 모르는 일이야. 그러면 정말 인연이라니까. 또 보게 되면 그땐 꼭 잘해봐, 알겠지? 애가 너무 예쁘고 예의도 바르잖아. 너무 아쉽다."

"아, 아. 됐어요. 이제 만날 일도 없고……."

하지만 나는 벌써 그 소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메일주소라도 물어 볼걸 그랬나?'

“아, 참. 유학을 어디로 간다고 했더라?”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요. 미국이나 영국이나 그런 곳이겠죠.”

“아니야. 내가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어. 부다 뭐라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 정말 왜 그러세요. 그런 도시가 어디 있어요. 됐어요!”

인연이라면…….

인연이란 무엇일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항상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이 인연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운명의 인연이라고 믿었던 사람과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연이란 것이 있다면, 그렇다면 나와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마지막 사람은 누구일까?

결국 나는 그 마지막 끈을 잡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달하기 위해 얽히고설킨 끈을 조금씩 풀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새 제주도 여행은 끝났다.

나는 돌아오는 비행기의 조그만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자리의 아주머니는 좌석에 앉자마자 깊은 잠에 빠지셨다.

놀라운 아주머니를 발견한 것도 큰 수확 중 하나였다.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의외로 새로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왜 여전히 쓸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걸까?

구름위에서 보는 노을은 더 붉게 타고 있었고 내 마음은 더 공허해져만 갔다.

아주머니는 다시 혼자인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일을 시작했다. 신청자들이 엄청나게 쌓여있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의 배낭여행 준비는 잘 진행되었고 비행기 표를 비롯하여 숙소, 교통편 등의 예약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머니의 집으로 자연스레 향했다.

비행기 편은 예약했기 때문에 오늘은 기차표와 숙소를 알아볼 예정이었다.

아주머니 집에 도착 했을 때 누군가 와 있었다. 마당에는 소형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고 집안은 소란스러웠다.

"아주머니."

나는 조심스레 내 존재를 알렸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나온 건 아주머니가 아니라 젊은 여성이었다.

"누구세요?"

내가 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세요?"

공격적인 그녀에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굉장히 어렵게 내 존재를 설명했다. 물론 전부 말 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돌려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아니, 아주머니의 어설픈 거짓말을 딸이 눈치 챘다.

“저 사람이 그니까 그 기자 맞는 거지? 당신이 우리엄마 이용해서 기사 쓴 사람 맞지?”

“네? 네…….”

아주머니의 긴박한 눈짓에도 나는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그녀는 굉장히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당신, 그렇게 함부로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아주머니가 나를 구해주려고 나섰다.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 잠자코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아주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하고픈 말은 다 하는 아주머니답지 않게 굉장히 주눅들어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 내가 모를 줄 아나본데.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걸 고맙게 생각해! 사람이 죽는 걸 지켜보겠다고?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

“그 부분은 오해가 있는 것…….”

“엄마 당장 짐 싸.”

아주머니는 어떡해해야할지 모르는 5살 어린이처럼 당황해 했다.

“엄마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여기서 뭐 하려고? 엄마가 자꾸 이렇게 바보 같이 구니까 저런 사람들이 꼬이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아주머니를 데려가려고 했다.

내가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이유였다. 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기에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읽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아.’

“저, 저기요. 아주머니가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녀가 나를 노려봤지만 나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배낭여행 가실 거예요. 그 이후에 모셔가는 게 어때요?”

“뭐라고요?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거예요? 엄마, 저 사람 무슨 소리하는 거야?”

아주머니는 차마 딸을 쳐다보지 못했다.

“당신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시나요? 자신의 꿈이 뭔지도 모르고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일평생을 살아왔잖아요.”

“당신이 우리 가족이야? 그걸 왜 당신이 신경 쓰는 건데.”

“이제 어머니를 위해 조금만 양보하는 게 어때요. 하고 싶은 것도 하게 해드리고 어머니를 위한 시간을 주는 것이…….”

“당장 짐 챙기세요! 안 그러면 경찰 불러서 저 사람 잡아 가라고 할 테니까.”

딸의 강압적인 말에 아주머니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여행할 때 한 번은 내가 물었다.

“여행 다녀오면 집이 없을 텐데, 계속 이곳에 사실 거죠?”

나는 아주머니가 계속 이 지역에 사시길 원했다.

“일단은 여행만 생각해야지. 두 가지 다 생각하면 머리 아파.”

“자식들 집으로 들어가는 건 어때요?”

“아들놈은 5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소식 듣기도 힘들더라고. 먹고 살기 힘든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번 연락이 오니까. 부모가 좀 더 도와줬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어 버려서…….”

“딸도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있지. 하나는 거제도에서 살고 다른 하나는 대구에서 살아. 근데 요새는 뭐 자식들이야 떠나면 그만이지. 지들이나 잘 살면 그걸로 된 거지 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렇긴 하죠.”

“두 딸내미네 집에서 며칠씩 있어봤어. 그런데 뭐, 손주들이나 사위가 늙은이를 좋아하겠어, 당연하거지. 우리조차도 누군가 집에 와 있으면 불편하잖아.”

언젠가부터 부모는 자식의 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걸까? 항상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그만 돌아가세요."

그녀는 내게 차가운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밖으로 나와 아주머니와 항상 앉아있던 앞마당 구석에 앉았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딸은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자식들의 착각이다. 아주머니가 그곳으로 가게 된다면 눈칫밥을 먹으며 불편한 생활을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에 마땅히 지낼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것이 말이 옮은 것일 지도 모른다.

몇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이 짐을 들고 나왔다.

"아직도 안 갔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아주머니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아, 이 사람이 정말!"

"그만해. 박기자가 그래도 나를 많이 도와주었어. 고마운 사람이야."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움찔했다.

‘내가 고마운 사람이라니.......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던가.’

"도와줬다는 사람이 50대 아줌마를 혼자 외국으로 보내려고 했어요?"

"그건 내가 원했던 거라니까."

"엄마가 자꾸 이러니까 아빠도 그렇게 떠난 거 아냐."

"이봐요.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요. 당신 어머니가 뭘 그리 잘 못했다고 그래요. 아주머니가 이렇게 된 게 왜 아주머니 본인 탓이죠? 그 사람 이 잘 못 한 거 아닌가요."

"우리 가족 일에 당신이 끼어들 이유는 없을 텐데요. 엄마! 그만가자고!"

당장이라도 폭발 할 것처럼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녀가 차에 짐을 싣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내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나를 쳐다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말 안 해도 다 알아요.'

그녀는 차에 올라타 신경질 적으로 문을 쾅 닫았다.

"엄마 빨리 타!"

"밥 잘 먹고……."

"아줌마는 할 줄 아는 말이 그 말 밖에 없어요. 하하."

누가 봐도 어색한 나의 억지웃음.

아주머니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차에 올랐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녀는 나를 한 번 노려본 뒤 액셀러레이터를 밝았다. 차는 점점 멀어져 갔다. 시골길을 이리저리 빠져나간 차가 저 멀리 보였다.

온갖 나쁜 상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나는 아주머니가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랐다.

나는 손을 들고 서툴게 흔들었다.

아주머니를 떠나보내는 느낌은 이상했다. 몸 안에 무언가 훅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눈물이 나지 않는데 눈물이 나올 때보다 이상하게 더 아팠다. 처음 느껴보는 아픔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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