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날개가 꺾인 사람들
날개가 꺾인 사람들
막상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으려 하니 쉽사리 찾아지지가 않았다.
그나마 안면이 있던 사람들을 통해 경찰서를 드나들어봐도 내게 인터뷰를 해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점점 잔인한 인간으로 변해가는 나 자신을 보았다.
소극적이었던 처음과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다리 중간에 서서 저 멀리를 바라본다던지,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사람들, 목적 없고 의미 없는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내 목표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돌려 가면 말했지만 괜한 오해만 더 살뿐이었다. 특히나 여자들에게는 변해버린 나의 외모는 마치 연쇄살인마 혹은 강간범처럼 보였다.
외모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해 여자들에게는 다가갈 수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언제 죽음을 생각했냐는 둥 나의 외모에 공포를 느끼며 다시금 현실로 돌아가곤 했다.
'혹시 자살하실 거예요?'
결국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나를 미쳤다고 생각했고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아주 큰 비밀을 들킨 듯 당황해했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화를 내며 애써 감추려 했다.
나는 그들이 정말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런 경우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서울 하늘 아래서만 찾으려 했던 것이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된 건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였다.
다른 성향을 가진 잡자사의 두 여자는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대학 졸업 후 똑같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둘 다 그리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와 대화할 일이 없었고 나는 주로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식이었다. 그들도 그리 수다스럽지 않았지만 대화가 한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었다.
하루는 그들의 동네에서 일어난 작은 일에 대해 열띤 수다를 이어가고 있었다. 종합해보자면 40년 가까이 살아온 부부의 이혼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나쁜 놈은 아저씨고, 불쌍한 여자는 그 아줌마였다. 아저씨는 다방 직원과 바람이 나서 아줌마 몰래 딴살림을 차렸는데 세상에 비밀이 없듯이 불륜관계가 발각되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빌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 오히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아줌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마치 잘됐다는 것 마냥 말이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알아온 아저씨의 추악한 행태에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줌마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 기뻤다.
"저, 저기요. 제가 그분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나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두 여직원은 동시에 인상을 구기며 나를 쳐다봤다. 연락처는 얻을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을 따라가 그녀가 머물고 있는 집의 위치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하고 며칠 동안 그 동네를 서성이다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금 용기를 내어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다.
집 앞마당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돌 위에 50대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짧은 뽀글이 아줌마 파마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 그리고 굳은 농사일로 변해버린 굻은 손가락 마디마디, 언뜻 봐도 전형적인 시골 아줌마의 모습이었다.
"저, 말씀 좀 물을게요. 여기 그 이혼하신 아주머니가 살고 계신다는데 맞나요?"
"그게 난데?"
"어, 어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여기 동네 분인 줄 알고……."
"뭐, 동네가 다 아는데, 여기는 비밀이 없어. 아니, 그나저나 총각은 누구신지?"
"저는 읍내에 있는 여성 매거진이라는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박윤재라고 합니다."
"아, 거기 알지. 거기 만식이네 큰딸 다니잖아."
"네, 맞습니다."
두 여직원 중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둘 중에 한 명이 만식이네 집 큰딸이 확실했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근데 무슨 일로 거기서 날 찾지?"
"아, 그쪽에서 찾는 건 아니 구요. 제가 아주머니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싶어서요."
"아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동네 창피하게 그 무슨 짓이야."
아주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거부했다.
"이혼에 대한 건 아니고요. 전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신 거 맞죠? 저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쓰고 싶습니다."
내 말에 아주머니의 얼굴은 급격히 굳어지며 어두워졌다.
"죄, 죄송합니다."
"그게 말이야. 그때는 너무 성질나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지."
아주머니도 대화 상대가 필요했는지 의외로 쉽게 말문을 열었고 나는 자연스레 아주머니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9월의 가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에 나는 아주머니와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총각은 몇 살이나 먹었어? 우리 딸 하고 비슷한 거 같은데?"
"따님이 몇 살인데요?"
"서른아홉."
좌절감이 밀려왔다.
"저 아직 삼십 대 초반이에요."
"아이고, 근데 왜 얼굴이 그래? 아주 해골이네 해골. 밥도 못 얻어먹고 다녀?"
또다시 좌절감이 밀려왔다. 기자는 나이고 내가 물어봐야 하는데 오히려 질문을 받고 있다니.
"아주머니 이야기를……."
"그러고 다니면 여자들이 다 도망가. 요즘엔 외모가 중요한 거 몰라?"
'아줌마, 나 말 좀 합시다!'
문득 궁금했다. 이 아줌마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긴 한 것일까?
"아직 젊은데 왜 그래? 세상에 여자가 뭐 하나뿐이겠어."
나는 그 순간 정지해버렸다. 도대체 이 아줌마는 정체가 뭐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 나이에 요러고 다니는 거 보면 뻔한 거 아니겠어. 요새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아주 밥 먹듯 하더라고."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전아 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자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요!"
분위기 반전을 위해 눈을 부릅뜨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중간에 내 말이 끊길까 봐 어찌나 빨리 말했던지 마치 속사포 랩처럼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원."
아주머니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돌려 광활하게 펼쳐진 황금들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바람에 황금빛 들녘이 일사불란하게 일렁거렸다.
나도 아주머니를 따라 벼이삭 사이로 바람이 이동하며 만들어내는 소리를 눈을 감고 잠시 감상했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바람소리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벼이삭들이 서로를 부딪혀가며 존재하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마음의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참 오래됐네.”
“뭐가요?”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게 말이야.”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방에서 그 사람을 만났는데(내 눈치를 보며), 그때는 선을 자주 봤으니까. 사실, 그 전에도 나 좋다는 사람이 많았거든 (다시 내 눈치를 보며),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땐 괜찮은 편이었어, 눈도 크고.”
아주머니는 수줍게 웃으시며 말했다. 실제로 진한 쌍꺼풀의 두 눈이 유독 크고 눈동자가 맑아 보였다. 그때의 추억 때문일까, 아주머니 눈이 초롱초롱했다.
“근데 쉽게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거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눈이 조금 높았거든. 그 사람을 만났는데 여전히 내 마음은 열리지 않았고 나는 빨리 그 자리를 마무리 짓고 싶음 마음뿐이었어. 그래서 대충 차 한 잔 마시고 그만 가겠다고 말하며 일어섰는데, 글쎄, 이 사람의 표정이 왠지 슬퍼 보이는 거야. 하지만 난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지.”
나는 아무런 말없이 집중해서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길을 걷다 보니 발걸음 너무 무겁더라고, 그 사람이 신경 쓰였던 거야. 도저히 안 되겠어서 뒤돌아서 다시 다방으로 들어갔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혼란스럽더라고. 내가 뭐 대단한 여자도 아닌데 왜 저 사람에게 모질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다시 자리로 가 앉았지. 그 사람 얼굴을 보는 순간 이 남자는 내가 아니면 안 될 거 같더라고. 집에 가서도 그 사람의 뒷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거야.”
아주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황금들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논에서는 벌써 이른 수확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도 채 안 돼 결혼했고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된 거지."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사랑? 아이고, 뭐 우리 같은 세대 사람들이 사랑이 뭔지나 아나. 그냥 서로 마음에 들면 결혼하고 그런 거지.
그 시대에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도 참 열심히 살았어. 그 사람은 농사짓고 나는 공장에 다니며 애들 키우고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살았지. 생각해보면 하루가 참 어떻게 가고 1년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10년, 그리고 지금까지 온 거야. 하루를 제대로 느낄 시간조차 없이 빠르게 온 거지."
"애들은 잘 자랐어요?"
"아이 그럼. 딸 둘 아들 하나 다 시집가서 잘 살고 있지. 좀 멀리 있어서 자주 찾아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참 뿌듯해."
아주머니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워한다는 걸 알았다.
"근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때론 내가 너무 성급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이제 좀 살만했거든, 우리 앞으로 논도 있고 집도 있고. 근데 그 사람한테 그런 여유가 독이 된 건지....... 어느 날 빨래하려고 바지 주머니를 뒤지는데 파란 알약이 있더라고. 그래서 그게 뭔지 개똥 엄마한테 물어봤어."
"개똥 엄마요?"
내가 물었다.
"아, 이웃집 아줌마."
"아, 네."
"그 여편네가 좀 똑똑하거든, 책도 많이 읽고. 아무튼 그랬더니 그게 뭐라더라 이름이 그리아나 뭐라나. 그 남자가 여자들이랑 그 짓거리할 때 먹는 거."
"아, 비아그라요?"
"그래! 그거라는 거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바람피우고 그럴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여자 앞에서 좀 수줍어야지 그 양반이. 근데 자꾸 외박을 하는 거야. 그때부터 의심을 하기 시작했지.""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내가 참 미련하지만,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냥 잠자코 있었지. 그런데 글쎄 개똥 엄마가 그 사람 뒤를 미행을 한 거야."
아주머니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어. 이전부터 다방여자와 살림 차려 살고 있더라고."
"어떤 기분이셨어요?"
"어떤 말로 그 기분을 표현할 수 없을 거 같은데, 무엇보다 배신감이 컸어. 그래서 집 앞에서 농약을 들고 죽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그게 동네방네 다 소문 난거지 뭐야."
“아, 네.”
"동네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어. 근데 그게 거기까지 소문 난거여?"
"아니, 뭐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빨리 죽어야 돼. 이 나이에 온갖 망신 다 당하고……."
"이혼하신 거예요?"
"했지. 해달라고 하는데 어쩌겠어. 논 한 마지기 받고 집 나왔지 뭐. 나왔는데 막상 갈 때가 있나……. 쯧, 아이들한테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여기 빈집에 잠깐 살고 있는 거야."
“앞으로 다른 계획은요?”
“계획? 그런 게 뭐 있겠어.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어. 그냥 있다가 가는 거지 뭐."
잠시 후, 담담히 말하시던 아주머니는 갑자기 새까맣고 두꺼운 손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손주의 재롱을 보며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야 할 나이에 거리로 내몰린 50대 여인, 오랜 시절 동안 고통을 감내하며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누릴 자격을 강제로 빼앗겨 버린 가여운 여자.
하지만 난 담담했다.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작은 여유조차 내겐 없으니까.
"내가 주책없지. 기자 총각한테 무슨 짓이야 이게. 이제 그만 가봐."
"내일 또 와도 되나요?"
"오늘은 허락받고 왔나. 근데 또 와서 뭐 하게? 더 이상 해줄 말도 없는데."
"그냥요.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아주머니는 허락도, 거절도 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집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나의 집으로 향했다. 매일 밤 차가운 현관문을 열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과연 내가 내일 아침 이 문을 열고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관할 뿐이다.
다음날 오후 나는 아주머니 집을 다시 방문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오랜동안 기다렸다. 흙바닥에 누워 가을 하늘을 만끽했다.
오랜만에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오후가 되었지만 아주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벌써?'
궁금하기도 했고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갑자기 그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 남자의 이야기도 들어보면 더 좋을 것만 같았다.
바로 옆 동네이기 때문에 걸어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물어물어 그 남자 집 앞에 도착했다. 집 앞마당에는 할머니가 나와 큰 나무 그늘 아래 의자 하나를 두고 앉아 계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지만 할머니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전방만 주시했다.
큰 창을 통해 거실이 보였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집안에 누구 있어요?”
내가 다가가 묻자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어디 갔어요?”
침묵.
“식사는 하셨어요?”
침묵.
“배고프세요?”
할머니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초코파이 하나를 꺼내 할머니에게 드렸다. 할머니는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드셨다.
잠시 후, 마당으로 오래된 은색 갤로퍼 한 대가 들어왔다.
“누구세요?”
차에서 내린 여자가 물었다. 나이는 40대 후반, 화장은 50대, 복장은 촌스런 30대 스타일, 머리는 90년대 노는 아줌마 스타일.
아줌마가 가까이 다가오자 진한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났다.
50대 남자도 따라 내렸다. 50대 후반에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어울리지 않는 보라색 셔츠를 바지 깊숙이 쑤셔 넣고 산지 며칠밖에 안 되어 보이는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저는 잡지사 기자고요. 아저씨께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기자가 왜 왔냐며 따질 것 같은 모습의 여자는 귀찮은 듯 할머니를 모시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슨 일 때문이요?”
나는 있는 그대로 모두 설명했고, 기사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의외로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에게 너무도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미안함은 바람을 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지금까지 희생한 것이 미안하고 불쌍하다고 했다.
“나도 알지, 내가 나쁜 놈이라는 걸.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데. 그 사람을 잡아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봐요! 그걸 말이라고 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구해준 사람 등에 칼을 꽂은 거야. 당신이 사람이라면 저 개도 사람이야!"
나는 너무 화가 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그를 노려봤다. 생각해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배신감이 그 순간 내게도 느껴졌던 것일까? 나는 괜스레 화가 났다.
큰소리에 그의 새로운 부인이 달려 나와 그와 나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당장 꺼져!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거야!"
나는 순순히 물러섰다.
화가 났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다정하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곳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나는 다음날 아주머니를 만나러 다시 갔다. 하지만 여전히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그 후로 일주일 동안 매일같이 찾아갔지만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아주머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마지막으로 다시 찾아간 그곳에서 전처럼 마당에 앉아계신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아주머니!”
나는 반가움에 소리쳤다.
“아이고, 또 왔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제가 얼마나 많이 찾아왔는지 아세요?”
“고향 좀 다녀왔지. 아버지 어머니 뵌 지가 너무 오래되었더라고 지금 아니면 다시 뵐 수 없을 거 같아서, 산소에 술도 한잔 따라드리고 오랜만에 이야기도 하고 왔지. 그나저나 늙으니 자꾸 찾아와서 뭐하게, 더 이상 할 말도 없다니까.”
“아직 기사가 완성이 안돼서요.”
“대체 나에 대해서 뭐라고 쓸지 궁금하네.”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저씨 만났어요.”
“아저씨?”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도?”
“네.”
“예쁘지?”
“꾸민다고 다 예쁜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예쁘다고 그러던데…….”
“누가 그래요? 내 눈엔 아주머니가 좀 더 나은 것 같은데요.”
“에이, 그런 말 말아.”
“진짜 데....... 저는 거짓말 잘 못하거든요. 물론 그 여자가 잘 꾸미니까 아저씨들이 그 화려한 화장품과 옷들에 착각해 섹시하다고 느끼는 거지 얼굴 이목구비만 보면 그리 예쁘지 않더라고요.”
“말이라도 고마워. 어쨌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니까.”
“맞아요. 그 사람도 아주머니가 새로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대요.”
“새로운 인생? (웃음) 다 늙은 아줌마한테 새로운 인생이 어디 있겠어, 일할 곳도 없고 대화할 사람도 없는데.”
“저랑 대화하고 있으시잖아요?”
“총각은 그 글인가 뭔가 다 쓰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사람이잖아.”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데 아주머니는 죽을 생각이나 하는 게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총각도 내 입장이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하겠어. 하지만 정작 살아가는 건 나라고.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젊음도 없어, 또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도 없고. 근데 억지로 살아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 남은 생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죽는 게 꼭 나쁘지 많은 않을 거야. 특히나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죽지 말라고 열심히 살아가라고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머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밥은 먹고 다니기는 하는 거야? 어떻게 얼굴이 사람 얼굴 같지 않네. 나보다 먼저 죽을 거 같아."
아주머니의 시선을 피해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단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을 뿐이다. 보지 않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런 내가 다른 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밥이나 먹고 가."
"아, 아니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서 들어와."
아주머니가 차려준 밥상은 시래기에 된장을 풀어 넣고 끓인 찌개 그리고 고추 장아찌가 전부였지만 맛은 그 어떤 반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좋았다.
사 먹는 것에서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맛이 한 가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반찬이 없어서 밥 먹으라고 말도 못 하였는데 얼굴 보니 이거라도 먹는 게 나을 거 같네.”
“아니에요. 정말 맛있는데요.”
“여기서 잠시 동안 살고 있는 거라서 뭘 할 수 있어야지.”
“이 집에는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개똥 엄마가 아는 사람 집인데. 봄에 여기 허물고 공장을 짓는다고 몇 개월 살 수 있다더라고. 그래서 왔지. 어차피 갈 때도 없으니까.”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서 밥이나 먹고 가.”
나는 다음날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때마다 아주머니는 항상 마당에 나와 계셨다.
"내가 꼭 한번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어느 날 아주머니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뭔데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주머니는 머뭇거리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여행? 여행이라면 강원도가 가깝고 좋겠군. 공부? 아냐, 오늘내일 죽고 싶은 사람인데. 바다가 보고 싶을지도 모르지, 영화 속에 나오는 죽기 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잖아.'
"아니야. 괜한 말을 꺼냈네."
"괜찮아요. 말씀해보세요."
잠시 침묵.
“여행, 여행을 하고 싶어.”
예상대로였다.
"어렵지 않아요. 그냥 떠나시면 돼요. 저번에 고향 다녀오셨잖아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여행인걸요."
"여행은 여행인데....... 국내 말고 유럽 배낭여행."
나는 당황해서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50대 중반 아줌마가 배낭여행이라니!
"유, 유럽 배낭여행이요?"
"힘들겠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아주머니는 갑자기 의기소침했다.
"아,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란 걸 나도 알지. 꿈이었어. 하지만 현실이 될 수 없는 게 꿈이라는 거니까……."
"근데 어떻게 유럽 배낭여행을 생각하신 거예요?"
"시골에서 일만 하던 내가 배낭여행이 뭔지나 알았겠어. 한 10년 전에 동네 이장 아들이 그걸 갔다고 하더라고."
"유럽 배낭여행이요?"
"그래. 그땐 그냥 뭔지도 모르고 그런가 보다 했지. 매일 일만 하고 살던 내가 하고 싶은 게 어디 있었겠어. 그냥 살았던 거지. 근데 텔레비전에서 유럽 배낭여행에 대해 나오더라고. 그때 그런 생각을 했지, 저곳에 젊은 내가 서있다면 얼마나 설레고 행복할까, 젊은 내가 말이야."
'그래도 아줌마는 안돼요. 너무 늙었잖아요.'
이성적으로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주머니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다 늙은 아줌마가 배낭 머시기를? 내가 미쳤지. 왜 이런 말을 꺼내 가지고.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지!"
아주머니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셨다.
“아휴, 내가 미쳤나 봐. 정말 미쳤나 봐.”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온 뒤 많은 생각을 했다. 나 역시 경험이 없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인터넷으로 유럽 배낭여행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 반,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아줌마 배낭여행 간다!
다음 날, 나는 책 몇 권을 사서 아주머니에게 갔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책을 받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유럽 배낭여행 꼭 보내드릴게요."
사실 겁났다. 내가 무슨 재주로 50 중반의 아줌마를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보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이유모를 용기가 났다. 내가 무언가에 홀렸던 건지, 누구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자신은 할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나는 화가 나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죽고자 했는데 여기서 죽든 거기서 길 잃어 죽든 그래도 꿈을 최소한 시도는 해봐야죠!"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스웠다.
아주머니는 나의 설득에 마침내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그러니까 제일 걱정되는 게 남들의 시선이다 이겁니까?"
"남 보기 부끄러우니까. 다 늙은 아줌마가……."
"늙은 게 무슨 죄도 아니고 그 말 좀 그만할 수 없어요?"
“밥은 먹었어?”
그날도 나는 아주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었다. 최근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일은 밥 먹고 마당에 앉아 가을 햇볕을 쬐는 것이었다.
“근데 왜 매번 여기 나와 계신 거예요?”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잖아.”
“시골 사시면서 여전히 햇빛이 좋으세요?”
“일할 때랑 다르지. 지금은 그 뭐지 그…….”
“힐링이요?”
“어, 그래 그거.”
“이제부터 저랑 공부해요. 공부해서 배낭여행 가셔야죠.”
아주머니는 여전히 난색을 표했지만 나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가보긴 했어?”
“저요? 저도 못가 봤죠.”
“아니, 왜?”
“그냥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모든지 젊었을 때 해야지. 이렇게 늙어버리고 나니까 이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잖아.”
“무슨 소리세요. 유럽 배낭여행 가셔야죠.”
나는 기사를 쓰는 것보다 아주머니의 여행 계획을 짜고 공부시키는 것에 더 집중을 했다.
그사이 첫 번째 기사가 나갔다. 솔직하고 가감 없이 아주머니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처해진 상황을 마치 연못에 살던 물고기가 갑작스레 먼 바다에 던져진 것에 비유했다.
연못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물고기가 큰 바다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 새로웠던 걸까, 아니면 자극적이었던 걸까? 사람들은 내 기사를 사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오로지 아주머니의 유럽 배낭여행 준비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했다. 아무것도 없는 대지위에 100층짜리 건물을 올리는 것이 더 간단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머니의 한 가지 유일한 장점이라면 단 한 번도 한국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외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주머니의 배낭여행을 준비하면서 터득한 것들이 있다.
*아줌마 사용설명서*
1.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기에 설명은 되도록 짧고 간결하게 해야 한다.
2. 자신을 너무 과신하고 걱정이 없기 때문에 위험성에 대해 관련 영상 등을 보여줘야 한다.
3. 드라마를 되도록 보지 않게 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드라마 시청을 한다면 그 시간에게는 두 번 다시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아줌마가 고집을 부린다면 그냥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5. 아줌마와 논쟁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밥 먹어야지?'
아주머니는 나만 보면 이 말을 했는데 나는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오후 3시든 4시든 언제 봐도 항상 똑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항상 밥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도 또 먹고, 배가 불러도 무조건 먹었다.
그 이외의 시간은 배낭여행 공부를 했다. 책 위주의 공부로는 절대로 이 배낭여행을 성공시킬 수 없었기에 조금은 특별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부터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하나의 장면처럼 만들었다. 그렇게 1번부터 하나둘 쌓여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동영상으로 녹화하기 시작했다.
"아줌마 나한테 자꾸 한국말 하면 어떡해요?"
"답답하니까 그렇지. 아이고, 너무 힘들다 이거. 나 그냥 갈게. 가서 부딪혀 보는 거지 뭐."
"가면 이거보다 몇 배 더 힘들거든요! 자, 다시 해보세요."
아주머니는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지만 나름대로 꽤나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도 매번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생겼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이러고 있는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았다. 낯선 느낌, 마치 처음 가보는 외국 도시에 도착한 것 같았다. 계획과 다른 삶의 길은 항상 묘한 기분을 준다.
그것이 또 익숙해져 버리면 그 삶이 내 것이 되어버려 다른 삶이 오히려 어색해지고 만다.
나는 점점 연기파 배우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 동영상 몇 번 보셨어요?"
"두 번."
"아, 매일 최소 다섯 번씩 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그래 알겠어."
아주머니는 항상 그렇듯 대답만 잘했다.
동영상을 만들어 그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건강이었다.
젊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아주머니의 건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 오늘부터 운동을 해야 해요."
"아이고 나 원 참. 나 아주 건강해. 전혀 걱정 말라니까."
"그래도 해야 해요. 하루에 2시간씩 걷자고요. 당장 오늘부터 시작합시다."
"안 돼!"
"또 왜요?"
"이거 봐야지."
나는 힘이 빠져 고개를 푹 숙였다. 아주머니는 TV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를 손으로 가리켰다.
"드라마 좀 그만 보세요!"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 거 같은 마음, 그래서 어딘가에 집중을 해야 한다는 걸.
그래도 아주머니는 내 말을 은근히 잘 따라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자, 얼마나 좋아요. 와! 저 노을 지는 것 좀 봐요!"
깔끔하게 잘려나간 황금들녘 그리고 빽빽한 도시 가로등과는 다르게 듬성듬성 박혀 있는 시골 가로등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시골 가로등은 도시와는 다른 전구, 다른 철근을 쓰는 걸까? 유독 쓸쓸해 보였다.
걷다 보면 가로등이 사라지고 멀리 떠있는 듯 아른거리는 불빛들에게만 의지한 채 걷는다.
“너무 많이 온 거 아니에요? 그만 돌아가죠.”
“아이고 젊은 사람이 참. 한 10분 왔나?”
“20분은 왔거든요!”
“한 시간은 걸어야지. 이 길로 가다 보면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니까 걱정하지 마.”
문제는 나였지 아주머니의 체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쉽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조금씩 나아지고 발전되어갔다. 처음 시작은 절망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무것도 없었던 백지위에 윤곽이 점차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만리장성도 처음에는 작은 돌 하나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글을 읽는 것은 아주머니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여행 가이드북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여러 숫자와 알파벳 도시 지명들이 뒤섞여 아주머니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정말 영어 못해도 가능한 거야?”
“걱정 마시라니까요. 저 못 믿으세요?”
아주머니는 영어가 안 되면 절대로 외국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영어 어렵지 않다니까요. 자 보세요. 이거 하나면 다 돼요. 만약에 길가다가 누군가 길을 막고 있다면 이렇게 하면 돼요. ‘Excuse me.’ 그리고 외국인이 말을 시켰는데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Excuse me?’ 길을 잃어 물어봐야 할 상황이 생기면 아무나 붙잡으며 ‘Excuse me!’ "
“지금 장난하는 거야? 왜 계속 똑같은 말을 해?”
아주머니는 내가 장난친다고 생각하셨다. 선뜻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이참! 뉘앙스의 차이죠, 뉘앙스!”
“뉘앙스?”
“네. 잘 보세요. 첫 번째 상황은 길을 비켜 달라는 거잖아요. 그러면 'Excuse me.' 하면서 검지로 나를 한번 가리키고 앞의 길을 다시 가리키는 거예요. 아! 그리고 표정은 입 꼬리를 살짝 올린 상태여야 해요. 또 그 순간 고개를 살짝 옆으로 갸우뚱하는 게 중요해요. 난 앞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으로. 자, 해보세요.”
“이, 이렇게.”
아주머니는 손가락을 반쯤 구부린 후 억지미소를 짓고 고개는 삐거덕 거리며 힘들게 오른쪽으로 확 꺾었다.
“아줌마! 그러다 목 나가요.”
아주머니는 마치 목이 꺾인 처키 인형 같았다.
“휴, 무섭네요.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아요.”
"이렇게 하라고 할 땐 언제고……. 그럼 두 번째는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두 번째 상황은 말이죠. 최대한 궁금한 표정으로 왼손은 살짝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깨 높이로 들고 고개는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눈은 3분의 2 정도는 감아야 해요. 그리고 왼쪽 귀를 상대방 쪽으로 내민다는 느낌으로 하면 되는 거예요.”
“뭐가 이렇게 어려워.”
“아니에요. 쉬워요. 자자 따라 해보세요.”
엄청나게 자연스럽지 않고 다소 웃기기도 한 모습이었지만, 아주머니의 그런 모습이 재밌고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우리는 운동과 공부를 동시에 했다. 함께 길을 걸을 때면 나는 전날 외웠던 여행 영단어를 묻고 또 물으며 반복 학습을 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10초 전에 알려줬던 영어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답답함에 모자를 땅바닥으로 집어던진 적도 있지만 곧바로 나의 행동을 후회했다.
직선으로 길게 쭉 뻗은 거리 끝에서 노을이 떨어지고 있었고 그곳을 향해 걷고 있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자 순간 울컥했다.
이유는 모를 쓸쓸함, 그리고 두려움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