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집을 나갔다.
벌써 두 번째다. 이번은 길다. 전화도 안 받고 메일을 써도 답이 없다. 사무실로 전화해서 출근한 것을 확인한 후, 무작정 회사로 찾아갔다. 남편을 만났지만,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다. 왜 집을 나갔는지, 언제 돌아올 것인지 궁금했지만, 아무런 답도 듣지 못한 채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2년 전 겨울 문턱에서 그렇게 남편은 홀연히 내 삶에서 사라져 버렸다. 건강한 세 아이,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직장, 미래에 대한 큰 꿈. 남편과 나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왔던 이 세 개의 끈이 끊어졌다.
내 인생에서 상상해보지 못했던 시나리오 앞에서 좌절했다. 삶의 바닥에서 헤매던 시절, 우연히 책을 만났다.
1년 동안 365권을 읽는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됐다.
흥미로웠다. 견고한 성이라 믿었던 가정이 무너져 버렸지만, 나까지 무너지지 않으려면 날 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매일 책을 한 권씩 읽는 일상은 내가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예측은 엇나가지 않았다. 이제 막 돌을 지난 막내를 포함해 세 아이를 키우고, 회사를 다니면서 책 읽을 시간까지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몸이 바빠지니 마음도 함께 바빠졌다.
가정을, 직장을,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도 없을 만큼.
‘1년 365권 읽기’ 프로젝트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최초로 달성하면 이지성 작가의 멘토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참여자들에게 동기부여가 됐다. 이 작가는 당시 자기 계발 분야에서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 작가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의 작가 여정보다 고난 극복 스토리에 끌렸다. 엄청난 빚에도 불구하고 재기에 성공한 집념을 배우고 싶었다.
프로젝트에 출사표를 던진 것은 2010년 3월 9일었다. 내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1월 1일부터 독서를 시작한 이들은 벌써 수십 권의 책을 읽어내고 있었다. 뒤늦게 참여한 만큼 속도를 내야 했다. 선두그룹에서 매일 리뷰를 남기는 이들과 건강한 경쟁을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독서시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먼저 수면시간을 4시간으로 줄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 전 나만의 시간을 마련했다. 점심은 늘 김밥 한 줄이었다. 시장기가 느껴지면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으로 메꿨다.
지하철 안은 물론이고 지하철역에서 나와 회사나 집까지 이동할 때도 책을 펼쳤다. 마트에서 장보며 계산대 앞에서 기다릴 때도 책을 꺼냈다. 반찬을 만들 때도, 잠깐 짬이 나면 책부터 집어 들었다.
아이들을 재우며 동화책을 읽어 주다 아이들이 잠시 한눈을 팔면 내가 읽던 책에 재빨리 눈길을 건넸다. 놀이공원에서 탑승 순서를 기다릴 때면 아이들 손에 어린이 책을 쥐어주고 나는 내 책을 펼쳤다.
주변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아이들도 나도 차츰 익숙해졌다.
매일 한 권씩 읽겠다고 결심한 후 처음 선택한 책은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인 <살아있는 역사>였다. 시련과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여성 롤 모델이 절실했던 내게 딱 맞는 책이었다.
마른 수건 짜내듯 시간을 짜내니 800페이지에 육박한 책을 1박 2일에 걸쳐 완독 할 수 있었다. 책장을 덮고 난 후, 가슴 안에 차올랐던 감동이 아직도 선연하다. 남편의 부재 속에서 아이들을 책임지며 숨 가쁘게 살던 내 삶의 버거움이 감당할 만하게 여겨졌다.
일단 삶의 온도를 높이니 독서 여정이 거침없이 진행됐다.
3월 27권을 필두로, 133번째로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끝으로 상반기 독서 레이스를 마무리했다. 독서 단상을 온라인 카페에 남길 때마다 나보다 먼저 시작한 동료들이 남긴 리뷰를 읽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제 365권 고지까지 남은 책은 232권. 하반기 6개월 동안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읽는 책이 쌓여가니 내가 조금씩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성마른 성질을 부끄러워하게 되면서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럴듯한 간판으로 뒤덮여 남들 눈에는 빛나 보이지만, 다른 사람 평판에 일희일비하는 삶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됐다.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매달린 내 마음속 절규에 귀 기울이는 게 우선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책을 읽을수록 희미한 내면의 목소리가 좀 더 또렷해졌다. 남편의 공백을 메워주는 주변 이들의 마음에 고마워하기보다 내게 부족한 것만 바라보면서 비극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울해하는 모습이 차츰 지겨워졌다.
책을 읽으면서 안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력은 있지만, 보지 못했던 반쪽짜리 삶과 결별하니 당연하게 받아들이곤 했던 것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됐다. 앎의 지평이 넓어지니 사색의 공간도 깊어졌다. 지적 호기심과 성장에의 열망은 중단 없이 독서를 이어가게 하는 또 다른 원동력이 되었다.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은 상당 부분을 필사하고 감상을 꼼꼼하게 기록하면서 인생 책이 되었다.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이나 헬레나 노르베르-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으며 보다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에 대해 고민해보게 됐다.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나 숭산의 <선의 나침반>은 영성의 힘에 대해 자각하는 계기를 선물했다.
철학, 종교, 인문, 사회, 자연과학, 예술 등 다양한 방면의 책을 섭렵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가슴을 띄게 한 것은 평전이나 자서전이었다. 서진규의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나 장윈청의 <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과 같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씩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깊은 감동을 안겼다.
365권 독서 미션을 11월 끝자락에 일찌감치 끝내고 나니 여성 1호라는 타이틀이 따라왔다. 첫 번째 주인공인 군을 막 제대한 청년에 이은 두 번째였다. 12월의 어느 날, 이지성 작가를 만났다.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갖고 있는 여러 고민을 토로하고 조언을 구했다.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삶의 방향을 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멘토링을 자양분 삼아 독서를 계속하자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에 1년간 402권을 읽은 내 이야기를 싣는 가슴 뛰는 경험도 이어졌다.
남편이 돌아왔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큰 충격을 받으면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이제 남편 없이도 내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조금씩 자리 잡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남편의 몸은 가족 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한동안 허공을 부유했다. 나는 아직도 그때 왜 남편이 가정을 떠났고, 왜 돌아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다.
때로는 내 마음조차도 헤아리기 어렵다.
내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의 이면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할 때도 많다. 다만 책 읽으며 이것은 배웠다. 나와 오랫동안 시공간을 함께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다 안다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그냥 그대로 덮어두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매일 책 읽는 내가 가끔은 극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책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책만 읽는 바보, 간서치가 되어 살아온 11년 세월. 책 없는 인생은 그려지지 않고, 그리고 싶지도 않다. 무의미하고 밋밋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이가 있을까.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독서를 통해 달라진 삶의 변화가 너무 크다. 책 읽으며 한 뼘씩 커나간 삶의 흔적과, 책이 내게 건넨 따뜻한 위로를 이제 다른 이와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