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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un 14. 2022

타임머신 체험기

과거를 함께 나누는 이들과 만나면 어느새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간 듯하다. 나만의 착각은 아니다. 외국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 즐기던 음악을 들려주고, 그 시절과 유사한 환경에서 생활하도록 했더니 신체가 젊어졌다는 거다. 어제는 이런 과거의 나와 세 번 만날 수 있었다.


11년 전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분들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모두 다른 부서에서 일하기에 이런 모임이 아니면 얼굴 보기 쉽지 않은 동료들이다. 한 주를 시작하는 첫날에 이런 반가운 약속이 있으면 출근길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성과를 내야 하는 2차 집단의 일원으로 만나게 된 사이지만, 이렇게 인연과 추억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네 것, 내 것 이익 같은 것은 따지지 않는 1차 집단 관계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요즘 회사생활의 어려움과 개인적인 애로사항을 나누다, 이야기의 종착지는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함께 했던 '리즈시절'이다. 그 당시 동료들의 요즘 사는 이야기, 그때 우리를 웃게 하고 힘들게 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나누다 보면 일주일치 행복을 미리 당겨서 쓴 느낌이 들곤 한다.




한 동료분과 퇴근 길이 겹쳤다. 같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회사 출입구까지 함께 이동했다. 발걸음을 옮기는 2~3분 동안 이런저런 근황을 가볍게 나누다 작별인사를 하려던 차에, 동료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아기자기한 파우치다. 남편분과 주말에 미술관행을 했다 예뻐서 샀다는 거다.


사실 이 동료분과 인연은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후배이자 수험생활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21년 전 내 결혼식에도 먼길 마다하지 않고 참석해준 고마운 친구이기도 하다. 워낙 미모가 출중해 당시 남편 친구들의 반응도 뜨거웠더랬다.


예상치 못했던 깜짝 선물 덕분에 안 그래도 기쁜 퇴근길이 더욱 기뻐졌다. 부담되지 않으면서 도움 될만한 선물로, 나는 어떤 걸 준비하면 좋을지 마음도 바빠졌다. 이 동료와 함께 했던 지난 세월을 되새기다 보니 캠퍼스를 종횡무진 누리던 20대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의 백미는 어젯밤이었다. 입직 전 연수원 동기 모임이 있었다. 사정이 있는 동기들이 함께 하지 못해, 같은 분임원 중 절반 남짓만 모였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처음 만난 후, 20년이 지나버렸기에 외모는 세월의 흔적을 거스를 수 없지만 뜨겁기 그지없는 마음만은 그때만큼 청춘이었다.


동기들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여러 질곡과 난관을 경험했지만 각자가 한 사람분의 몫을 당당히 해내고 있었다.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누군가는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자신만의 속도로 인생 궤적을 채워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누구도 자기보다 빨리 성장을 거머쥔 동기를 부러워하거나 질시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가 써내는 스토리를 뜨겁게 응원하고, 퇴직 후 인생계획과 전략을 함께 나눴다.


동기 중 한 명이 선물로 모자 등을 준비해와서 캡을 눌러쓰고 각자 기념사진을 촬영해 단톡방에 올렸다. 파리, 벨기에, 서울 등 다른 지역에 있어 참석하지 못한 동기들이 부러움 가득한 댓글을 남겼다. 20년 후에는, 우리 모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추석 연휴 앞뒤로 주말이 끼어 있는 골든위크이기에 2044년까지 버텨야 한다는 유머 짤을 본 적이 있다. 운 좋게 정년까지 채운다 해도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딱 13년이다. 휴일이 무의미해지는 퇴직 후 맞이하는 2044년 긴 연휴가 내게는 어떤 의미일까?


20여 년 전으로 시간 이동시켜준 어제 하루종일 세 차례의 만남은 충분히 즐거웠는데, 아침에 좀처럼 일어날 수 없었다. 마음만 약동했을 뿐 몸은 정직하게 내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간헐적인 한두 시간 만남으로 신체가 20년 전으로 회춘하는 기적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꾸미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럽고 편한 조우. 나의 내일을 만들어갈 새로운 인연을 쌓는 것도 기쁘지만, 역시나 내 인생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던 이들과 만남은 언제나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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