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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Sep 02. 2022

인생을 건 도박

인간은 자기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된다

                      (5년 만에 신혼여행 by 장강명)


양성평등 주간을 계기로 회사에서 준비해 준 <야구소녀>라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태원 클라쓰라는 드라마에서 낯이 익은 이주영 배우가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야구에 관심이 1도 없었는데, 주인공의 실감 나는 연기 덕분에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에 대한 관심까지 생겨 국내외 너클볼 투수들의 스토리를 찾아 열독 했다.


이 영화는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야구'라는 영역에 최초로 발을 디딘 안향미 선수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안 선수는 안타깝게도 프로선수로 입단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못다 이룬 꿈을 영화 속 주인공이 멋지게 마무리한다. 꿈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스토리는 넘친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나는 늘 벅찬 감동에 휩싸인다.


주수인의 주변 사람들은 다 그녀의 꿈이 무모하다고 그녀의 도전을 만류한다. 야구선수로서 빛을 보지 못하고 룸펜처럼 살아가는 남편에게 지쳐버린 수인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남편처럼 가시밭길 미래가 펼쳐질 거라 지레짐작하고 야구에 전념하는 수인을 강경하게 말린다.


이 영화는 힘 있는 간결한 대사 덕분에 더욱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죠? 나도 모르는데" "내 꿈은 무모한 게 아니에요. 확실한 거예요." "전 해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 모두 다 주인공의 대사다. 나 자신에게 되뇌고 싶은 문장이기도 했다.




지난달에 <한국이 싫어서>를 통해 만나게 된 소설가 장강명은 나와 동갑이다. 나는 나와 나이가 같은 유명인에게 더욱 눈길이 간다. 내가 요만큼밖에 살지 못했는데, 나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룬 그들에 대한 부러움 때문일 게다. '내가 이런 인생의 족적을 남길 동안 그들은 자신만의 삶의 지문을 저런 형태로 남기고 있구나'라는 감상은 덤이다.


장강명의 글은 위트가 넘친다. 이기호 작가나 김혼술 작가 못지않다. 신문기자 출신이라 글이 술술 읽힌다. 가독성이 높으니 장편을 꺼내 들어도 책장을 펴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 3년 전 그는 <아무나 '장강명'이 될 수 있는 이유>라는 기고를 남겼다. 글재주가 있지 않더라도 꾸역꾸역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나에게 희망과 광명을 선사하는 글이었다. 다소 길지만 너무 마음에 들어 그대로 옮겨둔다.


우리는 낚시가 취미인 사람에게 "낚시를 뭐하러 해요? 클릭 몇 번이면 싱싱한 생선을 산지 직송으로 배송받을 수 있는데"라고 따지지 않는다. 골프가 취미인 사람에게 "골프를 뭐하러 치세요? 프로가 되시기에는 이미 늦었잖아요"라고 묻지 않는다. (중략) 다른 취미에 대해서도 그렇다. 직장 동료가 댄스 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멋지다고 응원해주지, 언제 아이돌로 데뷔할 건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책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그거 써서 뭐하려고?'라고 스스로 묻고, '내가 그런다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어?'라며 자기 검열에 빠지는 걸까. 그냥 내가 좋아서 쓴다는 이유로는 부족한 걸까. 책 쓰기의 목적이 나 자신이어서는 안 되는 걸까.


책 출간은 자동차 운전과 다르다. 시시한 책을 내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자격 있는 사람만 책을 낼 수 있다'는 은근한 분위기는 이미 책을 낸 기성작가들과, 작가를 선망할 뿐 글을 쓰지는 않는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허구다. (중략) 저자 본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오거나 안 나오거나 별 상관없는 책이 신간 코너에 많이 있을 거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아무나 '장강명'이 될 수 있는 이유,  한겨레, 2019.12.7)




언젠가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2년 전 컴퓨터 비밀번호를 바꿨다. 화면보호기를 해제할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꿈을 상기하게 된다. 하지만 꿈을 이룰 만큼 부지런히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이미 냈던 두 권의 책이 그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아니었기에 비밀번호를 칠 때마다 꿈을 향한 다부진 결심을 되새기기보다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가까운 감정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나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잘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야무진 꿈도 버리지 않는다. 세 번째 책 계약을 목전에 두고 있다. 마음을 접고 전자책 출간으로 방향을 돌리려던 차에 찾아온 낭보라 기쁨이 더욱 크다. 생각해보니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제1호 독자 나를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 책은 세 아이를 키우면서 더 나은 부모가 되고 싶은 나 자신에게 방향타를 선사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책을 쓰고 나니 이제 부모 노릇은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두 번째 책은 직장에서 좀 더 나은 선배이자 후배가 되고 싶어서 썼다. 후배들과 함께 썼기에 MZ 세대를 더욱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책은 내게는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름의 해법을 찾고 싶어서 쓰게 됐다. 책을 쓰는 동안 남편의 시선에서 우리 관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매일 으르렁대다 갑자기 금슬 좋은 원앙 커플이 되는 것은 무리였지만, 책 쓰기 전보다 사이가 훨씬 더 나아진 것은 분명하다.


어제부터 네 번째 책의 컨셉이 자꾸 뇌리에 맴돈다. 아직 준비가 한참 부족해 매일 5시간을 집중해도 합격 여부가 불확실한 불어 시험이 이제 고작 두 달 남았고, 지난주부터 시작한 일본어 회화수업도 제법 시간이 걸리기에 올 가을은 글쓰기에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 책 쓰기에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반발심리에 더욱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이번 책 역시 나를 위한 것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으니 중장년 여성의 급변하는 삶에 대해 내가 직접 공부하고 알게 된 점들을,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내 자신에게 건네주고 싶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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