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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un 18. 2023

화가 잔뜩 난 헤어스타일로 해주세요

꽤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했던 인생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반년 남짓 꿈꿔왔던 여정이라서 충격이 컸다. 아무리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꼭 이렇게 반전 드라마가 내 몫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비운의 여주인공 역을 맡는 건 8년 전 남편의 실직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보다.


화가 나는데 표출할 만한 통로가 마땅치 않았다. 일단 보복지출을 감행했다. 느려터지고 용량도 64기가밖에 안 되는 구닥다리 핸드폰을 가장 최신형으로 교체했다. 평소 같으면 손을 벌벌 떨 만큼 큰 금액이었지만, 마침 금요일에 받은 월급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눈 딱 감고 질렀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쇼핑욕망을 맘껏 펼쳐 여러 벌의 여름옷과 신발도 구입했다.


그간 소홀했던 가족과 이벤트도 계획했다. 올 여름 휴가는 무조건 해외라고 통보했다. 유럽처럼 먼 나라를 희망하면 통 크게 긴 휴가를 내려고 했는데, 가족 멤버들의 꿈은 꽤나 소박하다. 이미 한 번 가봤지만 아쉽다며 일본을 다시 가고 싶다고 한다. 일본 여행에서 소통 거간꾼이 되기 위해 작년 여름 이후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일본어 공부를 재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 내 마음속 분노를 바깥으로 보여주고 싶다. 특히 내 미래 여정을 가로막은 그 분들께. 무작정 집 앞 미용실로 향했다. "화가 잔뜩 난 헤어스타일로 해주세요."라는 게 내 주문사항이었다. 두세 달에 한 번 머리 자르는 것 외에는 별달리 요청하는 게 없는 고객이었기에 원장님의 당황하는 눈초리가 느껴진다.


참고할만한 사진이 있냐는 원장님의 문의에 거울 앞에 붙은 사진을 가리켰다. "저렇게 고상한 스타일 말고 꼬불꼬불한 걸로 해주세요. 머리만 봐도 무슨 일이 있구나라고 알 수 있도록." 원장님은 알듯 말듯한 미소로 화답하시더니 사모님과 함께 이런저런 도구를 준비하셨다.


두 시간쯤 후에 어렸을 때 엄마 따라다녔던 전통시장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꼬불파마 아줌마와 만났다. 원장님의 살짝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떡하지, 생각보다 더 많이 화가 난 헤어스타일이 되어버렸네." 아프로 펌까지는 아닌데 앞머리까지 말아버리니 머리카락이 대책 없이 꼬불거린다. 헤어젤을 발랐지만 습기 잔뜩 머금은 여름바람 맞으며 집에 가니, 화가 잔뜩 난 수사자의 갈기에 컬이 들어간다면 이런 모습이었을 듯싶다.




내 운명이 다른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추려면 실력을 쌓아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강해졌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빤한 일을 하는 그냥저냥한 존재라면 아무에게나 쉽사리 대체되고 만다. 내가 지닌 강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특화할 수 있을까? 내가 진정 원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어제는 영어스터디만 3개였다. 더 넓은 세계로 도약하겠노라는 꿈이 좌절됐으니, 이렇게 이를 갈며 필사적으로 영어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잠시 스쳤지만, 이내 접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외국어 역량은 필수일 테고, 영어는 그 어떤 외국어보다도 범용성이 높으니 단단하게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


오전 7시대에 진행한 스터디 멤버분들과는 미래 진로와 관련해 진지하게 속마음을 나눴다. 오전 10시대에 2시30분간 진행한 스터디 멤버분들과는 향후 한국의 미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교환했다. 정말 신기한 게 이렇게 영어를 꾸준히 해도,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지 않다가 몇 시간 만에 다시 말하려고 하면 더듬거리게 된다는 거다.


아래 블로그에 남긴 책을 비롯해 3권 정도 독서를 하고, 한국어로 생각하고 말하다 저녁 9시대에 스터디에 참여하니 익숙한 주제였고 스터디 직전 1시간 가까이 준비를 했는데도, 말하는 중간중간 말문이 막히곤 했다.

https://blog.naver.com/justina75/223131966854


말과 글로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며
상호 성장을 돕는 이


내가 꿈꾸는 내 미래다. 지금 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 또 다른 세계에서 더 다양한 이들과 교류하는 것도 의미 깊었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좀 더 성장하고 기여하라는 게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평소에 라인홀트 니부어의 <평온의 기도> 맹신자답게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포기가 빨라서 다행이다.


마음을 바꾸고 나니 떠나지 않으니 누리게 될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막내가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변하는 길목에서 함께 할 수 있다. 아들이 훈련소에 있는 동안 애틋한 마음을 키울 수도 있다. 대학생에서 사회인으로 거듭날 큰 딸의 여정에 보폭 맞추며 소울메이트로서 손잡아줄 수도 있다.


그림 그리기, 악기 배우기, 댄스 배우기 등 좀 더 나이 들면 시간 할애해 보겠노라고 유예한 여러 취미들에게도 이제는 과감하게 눈길 돌려볼 수 있을 듯하다. 글로벌행을 꿈꾸며, 지도를 그려 넣고, 재정계획, 업무추진 목표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다이어리와는 작별하고, 6개월치 계획을 담을 수 있는 새 다이어리를 구입했다. 10년 전, 새로움을 감행했던 그해처럼 올 해도 내 인생에서 변곡점이 될 것 같다는 설렘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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