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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Sep 09. 2023

예상외로 가까이 있었던 롤모델들

9월을 맞이해 평일 오찬 약속을 이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나누는 익숙한 동료들이 대다수다. 이미 서로에 대해 꽤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배울 점도 많고,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을 이미 구현하고 있기도 하다.


9월 첫 불금에 점심을 함께 한 동료들은 4년 전, 같은 국에서 함께 근무했었다. 나를 포함해 셋 모두 초보를 막 뗏거나 이제 막 중견관리자로 출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일도 잘하고 개인적인 삶도 풍요롭게 꾸리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었던 우리는, 그 뒤로도 종종 만나 인연을 이어갔다.


성향은 각기 달랐지만 의외로 대화도 잘 통하고 삶에 대한 가치관도 크게 다르지 않아 우린 앞으로 정모를 갖기로 했다. 새로운 미션 론칭은 언제나 쌍수환영인 내가 모임명과 매달 진행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고, 늘 차분하고 선함의 대명사격인 동료는 모임통장을 개설해 재정을 담당하기로 했다. 미식가이자 베스트 드라이버인 동료는 미슐랭급 동네 맛집을 발굴해 예약하고, 모임 때 라이드를 책임지기로 했다.




금주 월요일에는 동기와 단 둘이 오붓하게 점심을 했다. 신앙심이 매우 깊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넘치는 이라서, 만나고 나면 그 친구만큼 착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작년까지 같은 국에서 함께 근무할 때 농담반 진담반으로 퇴직 후 커리어도 함께 하자고 했었는데,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구체적으로 퇴직 후에 기여하고 싶은 전문분야를 정해서 논의를 숙성시켜 보기로 했다.


화요일에 만난 후배는 후배가 수습시절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인연이 있었다. 후배의 남편분도 같은 계열에 계시고, 그분의 책에 내가 추천사를 써드리기도 하고, 그분 역시 내 책에 추천사를 남겨주시기도 했기에, 이 후배가 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최근 베이징에서 3년 간 체류하면서 중국어 실력을 제대로 쌓고 돌아왔는데, 중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는 이번 만남을 통해 그동안 중국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었다.




수요일에 만난 동료들은 12년 전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분들이었다. 많이 모일 때는 여섯 명 정도 함께 만나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근무지가 각기 달라져 한 자리에 함께 하는 게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저녁 모임을 기피하는 내게, 1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는 점심시간 동안 멀리서 근무하는 옛 동료 여러 명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선택지일지도 모르겠다.


이 날 자리를 함께 했던 한 분은 최근에 암투병을 하시며 힘든 시기를 겪은 분이었다. 병원에 직접 찾아가 뵙지 못해 송구한 마음이 컸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환한 미소를 가득 담은 밝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영면하기 전까지 최소 25~33%의 사람은 암에 걸리기에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직 퇴직도 한참 남은 젊은 나이대에 큰 병에 걸리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목요일 점심은 부서원분들과 함께 했다. 가을을 맞이해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한 분, 회사 인근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드로잉 클래스에 참여하는 분, 주말에 배우자와 함께 뮤지컬 관람계획이 있는 분. 다들 나름의 계획 아래 즐겁고 행복하게 일상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입사한 지 몇 년 안 됐지만 경제공부를 부지런히 하는 한 분은 자격증에도 도전하고 벌써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종잣돈도 모아뒀다.


목요일엔 평소의 내 소신을 깨고 저녁 모임에 나갔다. 평소에 바빠서 거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동료도 만나고, 단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선배님이 궁금하기도 해서 함께 했다. 두 시간 정도 이어진 저녁 자리를 통해 미지의 대상이었던 선배분에 대해 꽤나 알 수 있었다. 전문분야를 토대로 책도 두 권 내신 출간작가에, 등산에 조예가 꽤 깊으신 등산 마니아셨다. 퇴직 후 좀 더 전문적인 작가로 활약을 계획 중인 이 분의 성공비법은 내가 한 때 즐겨 썼던 공표였다. 주변 이들에게 미리 플랜을 나눠서 목표를 이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리는 거다.




어제는 회사에서 일잘러로 정평이 나 있는 분과 함께 했다. 몇 달 전 미국에서의 새로운 도전을 꿈꿀 때, SOS를 보낼 때마다 친절하고 상세하게 멘토링을 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컸던 분이다. 파리지엔느와 뉴요커를 모두 경험한 분이라 패셔니스트로도 평판이 높아, 이분 드레스코드 수준에 맞춰보겠노라고 내 옷 중 가장 화려하다고 생각되는 걸 입고 출근했더랬다. 살을 뺄 수 있을 거라고 예단하고 작은 사이즈를 샀지만, 감량 의욕이 좀처럼 생기지 않고 실행에 옮길 의지력은 더욱 부족해 올여름 내내 단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드레스였다.


도전해도 될까 싶었는데, 있는 힘을 다 해 간신히 등 지퍼를 올려준 남편 덕에 가까스로 옷 안에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제 이 분은 차분한 모노톤을 입고 나오셨다. 예쁜 옷들은 미국에서 배 타고 한국으로 오는 중이란다. 잔뜩 힘줘서 평소에 안 입는 튀는 옷으로 오버해 부끄럽고, 내 몸통을 감싸주며 열일하고 있음에도 힘없는 지퍼 탓에 숨 한 번 크게 내쉬기 어려워 불편했던 하루였다.


어제 함께 한 분은 강남에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천상 서울리안처럼 유복하게 자랐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굉장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의지의 한국인으로 꿋꿋하게 살아오신 분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고, 구직시험 합격을 위해 공부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시기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매 주말 지방을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지속하셨다고 한다.




그동안 난, 인생의 롤모델을 멀리서 찾아왔다. 하지만 행복을 찾아 멀리 떠났지만, 결국 그토록 찾던 파랑새는 자신들이 살던 오두막 바로 옆에 있었다는 틸틸, 미틸 남매처럼 내 롤모델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만났던 모든 이들의 삶 속에, 그들이 그려왔고 앞으로 내디딜 여정 궤적에 내가 꿈꾸는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족과 행복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주말마다 행복한 시간을 가꾸는 분. 3개 외국어를 동시에 공부하며 주말이 더욱 바쁜 분. 퇴직 후 소중한 이들과 음식과 와인을 나누는 일상을 꿈꾸며 건강과 재정관리에 진심인 분. 관심 있는 분야에서 역량과 기량을 쌓기 위해 매진하는 분.


올 가을 문턱에서, 이렇게 멋지게 빛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때는 자기 계발의 화신을 꿈꿨지만, 예상외로 슬럼프가 길어져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일상에 넌더리가 느껴지던 참이었다. 이제 드디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뜨거운 궤도에 탑승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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