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 가족이 방 한 칸짜리 사글세에 살던 유년시절. 빛바랜 사진 속에서 함께 고무줄 하며 놀던 내 친구는 성이 '지'씨였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늘 씩씩했고,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아이 앞에서 풀이 죽곤 했다.
원인 모를 불편한 마음의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친구 사이에도 역학관계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늘 머리 숙이며 공손했던 엄마의 뒷모습이 내게도 어느 정도 내면화되었나 보다. 그래서일까. 내 친구 폭은 현저히 좁았다. 나보다 잘난 아이와 친구가 되어 성장하는 삶을 꿈꿨지만, 이상하게도 학창 시절 이런 뛰어난 친구와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은 다 나보다 나은 점이 있었다
나보다 더 똑똑한 아이는 넘쳤다. 나보다 더 부자인 아이도 엄청나게 많았다. 달리기 꼴찌를 도맡았던 탓에 반 아이들은 다들 나보다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누구는 춤 실력이 대단했고, 누구는 철봉을 잘했고, 누구는 노래를 잘했고, 누구는 서예를 잘했다.
계주 때마다 전교생들 환호성을 독차지하는 친구랑도 친하고 싶었고, 소풍이나 학예회 때 박력 넘치는 커플 댄스를 선보이는 애들이랑도 친구 하고 싶었다. 책거리 단골 이벤트였던 노래하기에서 고막을 즐겁게 해 주던 꿀성대 주인공들과도 친해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지금 연락 주고받는 친구 중 이런 재능 가진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다.
내 곁을 지켜준 친구들은 대부분 다 나와 공통분모가 있다. 공부 그럭저럭 해서 커리어 우먼으로 일하는 친구가 몇 있다. 평범하게 20대 중후반에 결혼하고 아이 둘 정도 낳아 키우며 올해 대학생 엄마가 된 친구도 몇 있다. 끼리끼리 친해지는 것인지, 예체능에 다재다능한 친구들이 날 경원시했던 건지, 내가 그들을 피했던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다 해당이 되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내향적이었던 학창 시절, 그리고 지금도, 내 친구는 늘 한두 명이다
세명 이상 친구와 그룹으로 만나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내 친구는 늘 한 명, 많아야 두 명이었다. 동창회는 질색이고 늘 무명 씨처럼 주변인으로 살아왔다. 지금도 세명 이상과 만나고 나면 기진맥진한다. 그리고 보니 난, 자발적으로 나만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일찍부터 해온 셈이다.
아주 가끔 관계망을 넓히려고 노력해보곤 했다. 3개월 남짓 스피치 학원을 다닌 후 원우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인싸 코스프레를 해봤다. 글쓰기, 자기 계발, 외국어처럼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결성된 소모임에서 만난 이들과 인연을 길게 이어보려는 노력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어설픈 시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영 불편했다. 모임별로 단톡방이 있지만, 나는 주로 조용히 눈팅을 하는 부류다. 10여 년 남짓 이어온 블로그로 이웃님들과 글로 소통하는 게 내 수준에서 가장 적극적인 교류인 셈이다.
윤이형 작가의 <붕대 감기>를 읽었다
활자중독 수준인 나와 비슷한 인물이 '은정'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식한 아이 엄마'로만 남지 않겠다"(p.21)고 결심한 은정은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 때도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가며 억척스럽게 책을 읽곤 했다. 마음 터놓을 친구 하나 없이 메마른 삶을 살던 은정은, 인생의 고난 앞에서 속내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다.
설 연휴 끝자락에 이 대목을 읽다 문득 지금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부랴부랴 어릴 적부터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을 손꼽아봤다. 20년 전 결혼식 때 급히 서른 명가량 옛 친구들을 소환했고, 이후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는 이 중 반도 채 안된다.
죽을 때까지 계속 만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 십여 명 가운데,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도 몇 있다. 벌써 하늘나라로 가버린 친구도 있고, 신앙에 몰두해 바깥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친구들도 있다. 간헐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중에는 삶의 반경이 너무 달라 몇 년에 한 번씩밖에 못 보는 친구도 있다.
요즘 나와 매일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직장동료다
회사에 친하게 지내는 동료와 후배가 몇 있다. 내겐 친한 친구 못지않게 소중한 이들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흉금을 털어놓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