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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Feb 12. 2021

코로나 덕분에 행복한 설 연휴

결혼 후 한동안, 설 연휴 둘째 날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 중 하나였다.


기혼 여성이라면 자세한 설명 없이도 대충 이해할 듯하다. 82년생 김지영에 깊이 공감했다면 더더욱. 그럼에도 조금 설명을 붙이자면 시댁 내 '불평등'한 가사노동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설 전날, 시댁 남성들이 모여 술과 함께 왁자지껄하게 브로맨스를 다지는 동안 나를 비롯한 여성들은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끊임없이 설거지를 해댔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목소리는 높아졌고, 가끔은 시비조 언성이 등장해 가슴을 졸이곤 했다. 늘 이런 식이라면 '다음 명절에는 절대로 가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공허한 결심에 불과했다.


설 연휴 둘째 날, 제사를 지낼 때면 나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나는,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제사 지낼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남편은 전남 과음을 핑계로 제사상이 다 차려진 후에 느릿느릿 일어나 절만 하고 가득 차려진 음식을 먹은 후 또 자러 갔다. 난 물론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 설거지에 여념이 없었고.


결혼 후 처음 맞이한 설 명절

친정과 너무 상이한 명절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간신히 마음속 홧덩이를 짓누르며 견디던 내게 도전장이 던져졌다. 술이 잔뜩 취한 시댁 어르신 한 분이 새 식구가 된 나를 상대로 일장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 참아온 다혈질 성격이 드디어 봇물이 터져버렸다.


20대 후반, 오랜 수험생 생활을 마치고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난, 꼰대의 일장연설을 견딜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시댁 표현으로는 '당돌하게 눈 똑바로 쳐다보고' 딱 한마디 했다.


술 다 깨신 후에 말씀하시죠


이후 시댁 여러분을 통해 잔소리 네제곱을 견뎌야 했던 나는 그 뒤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법을 배웠다. 시댁의 눈살을 견딜 만큼 대담한 며느리가 되지 못했던 이유다. 매년 다음 명절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노라고 담대한 꿈을 품었다, 명절 즈음에 소심한 며느리가 되어 다시 시댁행을 하곤 했다.


남편도 나도 맞벌이하던 시절에도 견디기 어려웠던 성불평등한 문화는 남편이 실직한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느리지만 그럼에도 변화는 조금씩 시작됐다. 언젠가는 다시 직장을 구할 거라고 믿었던 막내가 좀처럼 경제활동에 뛰어들 의지를 보이지 않자, 내 가사노동에 대해 시댁분들이 불편한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댁분들의 마음이 느껴지자 서운한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시댁은 소소한 가사노동에는 남편의 동참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래도 시댁은 늘 가기 싫었다.


명절 스트레스 없는 명절


이토록 설 연휴가 기다려진 것은 결혼 후 처음이다. 코로나 19가 가져다준 몇 안 되는 선물 중 하나다. 수시간을 좁은 차 안에 갇혀 시댁이나 친정에 오가지 않아도 된다. 불필요한 과다 가사노동에 시달릴 이유도 없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 타는 걸 싫어한다. 그럼에도 타는 건, 내가 운전하는 건 그것보다 더 싫기 때문이다. 겁 많은 나는 3년 전부터 아예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 명절이 싫은 이유 중 하나는 네댓 시간 이상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꼼짝없이 타야 한다는 점이다.


밤낮이 뒤바뀌어 생활하는 올빼미족 남편이 두 시간 이상 운전할 때 늘 등장하는 리츄얼이 있다. 일단 고함을 지른다. 단발마일 때도 있고 조금 길어질 때도 있다. 이후에는 본인 뺨을 때린다. 졸음을 쫓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이다. 내가 싫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졸음방지용 커피와 껌을 사다 놓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다. 휴게소에서 쉬다 가자고 해도 남들이 있는 곳에서 편히 눈 부치지 못하는 성격 탓인지 바람만 조금 쐬고 괜찮다며 다시 운전을 한다. 그리곤 소리지르기와 뺨 때리기 액션을 반복한다.


지극히 평범한 설 연휴 둘째 날


코로나 '때문에' 일상의 자유를 많이 뺏겼지만, 이번 연휴는 코로나 '덕분에'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됐다. 가족 친지들과 정 나누기는 언제나 정답인 넉넉한 용돈과 안부전화로 대신했다.


어젯밤 새벽 1시 넘어까지 가족들과 영화를 봤기에 아침 기상이 늦어질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일어나 보니 역시나 내가 오늘도 1등이다. 조용히 3종 외국어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러 집 앞 공원으로 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담소를 나누고, 공놀이를 하는 가족단위 일행이 제법 보였다.


다른 가족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부러워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오가 넘도록 잠만 자고 있는 '이상한' 가족 멤버 4인방을 흔들어 깨웠다. 마침 운동 전 돌려놓은 세탁기 안 빨래가 다 되었길래 빨래 개기와 널기에 동참시켰다.


아, 행복하다


코로나 이후에도 설 명절을 늘 이렇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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