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난 퇴근 후에 서점으로 갔다. 당시엔 아직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지 않았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아직 도입되기 전이었고, 마스크는 구입이 쉽지 않은 때였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도서관뿐 아니라 인근 서점과 제휴를 맺고 새 책을 빌려주기도 한다. 반납하면 서점은 책을 도서관으로 이관한다.
도서관에서 늘 헌책만 빌려보다 서점에서 빌리는 새 책으로 독서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책을 다룰 때도 더욱 정성스럽게 보게 됐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책을 볼 때도 적용되는 것 같다. 낙서가 잔뜩 있는 헌 책을 볼 때는 책이 덜 소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깨끗한 새 책을 볼 때는 책장도 평소보다 더 살살 넘기게 됐다.
서점에서 빌렸던 네 권의 책은 다 나름의 사연과 함께 내 품에 들어오게 됐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인 '메멘토 모리'가 한 때 내 닉네임 었을 만큼 난 죽음에 관심이 많다.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를 죽음 앞에서 늘 준비되어 있고 싶다란 생각이 가득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내게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은 책은 제목만으로도 강렬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저자인 케이틀린 도티는 젊은 시절 6년간 화장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 70대 전직 회계사의 시체를 면도하게 된 에피소드로 책을 연다.
이어서 소개하는 에피소드에는 고등학교 시절 너무나 좋아했던 에드거 앨렌 포우의 <애너벨 리>가 살짝 등장한다. 하지만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앞으로 이 시를 읽을 때는 작가가 언급했던 것처럼 포우가 썩은 냄새를 풍기는 부패하기 시작한 애너벨 리의 시체와 포옹하는 이미지가 오버랩될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로 선택한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책은 21년간 검사로 일했던 분의 글이다. 저자인 구본진 작가는 우리나라 1호 필적 학자로 살인범과 조직폭력배의 글씨에서 일반인과 다른 점을 발견한 것을 바탕으로 이 책을 엮었다.
글씨를 잘 쓰는 건 누구나 바라는 소원이겠지만 내겐 좀 더 절실한 희망이다. 신체적 콤플렉스 때문에 속기가 습관이 되어버렸지만 빨리 글을 쓰는 습관은 악필로 이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씨는 나조차도 판독이 불가능한 경우가 잦아 학창 시절 무슨 글씨인지 골똘히 살펴보다 노트를 외우게 되곤 했더랬다.
양손 화상 중 오른손 손등 화상이 무척 정도가 심하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 필기를 해야 할 때는 다른 학생들보다 1.5배 이상의 속도로 빠르게 글을 쓰곤 했다. 다른 학생들이 놓치는 선생님 말씀도 난 거의 조사까지 포함해서 완벽하게 적곤 했기에 친구들이 내 노트를 자주 참고하곤 했다.
옆자리 짝꿍이 미처 다 못 받아 적은 선생님 말을 살피기 위해 내 노트를 보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때마다 난 오른손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필기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재빨리 필기를 마친 후에는 친구 눈길이 닿지 않는 책상 아래로 재빨리 오른손을 옮겼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악필이 더욱 부끄러웠다. 특히 중견관리자가 되고 나서는 더욱 그렇다. 일하다 보면 보고서에 가필을 해가며 피드백을 해야 할 때가 잦다. 문제는 내 글씨가 가독성이 낮다는 거다. 동료들이 종종 내 글씨를 못 읽고 묻곤 한다. 문제는 나 역시 내가 쓴 글씨인데도 가끔은 읽지 못한다는 거다.
절실한 내 마음을 반영해 이 책은 1년 전 오늘, 빌리자마자 절반을 바로 그 자리에서 읽었다. 실용서의 특징답게 이 책은 상황에 맞게 성공을 거머쥘 수 있는 손글씨의 마법 비법을 담고 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을 때, 공부를 잘하고 싶을 때, 일 잘해서 인정받고 싶을 때.
중요한 건 이론보다는 실천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안내된 대로 매일 20분씩 6주 플랜을 가동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더랬다. 안타깝게도 내 글씨는 여전하다. 1년 동안 부자가 되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나 실천이 중요하지만, 그 중요한 실천은 맘이나 말만큼 쉽게 뒤따르는 건 아니란 것만 다시금 깨달았다.
세 번째로 인연을 맺은 데이비드 롭슨의 <지능의 함정>은 평소에 관심 있는 확증편향과 관련되어 흥미를 느끼게 돼서 빌렸다. 똑똑한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 실수를 연발하는지, 어떻게 하면 보다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지를 안내해주는 책이다.
우리는 영리한 사람들은 보통 타인의 사고에 수용적이고 개방적이며 이를 바탕으로 범인들보다는 보다 현명한 사고를 할 거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 저자는 이런 우리의 편견에 일침을 가한다. 데이비드 롭슨의 목소리를 옮겨본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특정한 종류의 어리석은 생각에 더 쉽게 빠져들 수도 있다
머리가 좋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실수에서 교훈을 얻거나 타인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적다
실수를 해도 제법 그럴듯한 논쟁으로 자기 논리를 정당화하는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에 의심을 품지 않는 교조적 태도는 점점 심해진다
게다가 편향맹점(bias blind spot)까지 남보다 더 커서 자기 논리의 허점을 인지하는 능력도 떨어지는 듯하다(p.12)
일을 하다 보면 똑똑한 사람들을 꽤나 만나게 된다. 이 주장에 200% 공감할 수 있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겪었다. 이 책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 이유다.
마지막 책 <혼자 보는 그림>은 큐레이터이자 겸임교수 등으로 활약하는 김한들 작가의 글이다. 작년 초, 아크릴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채색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새롭게 갖게 된 취미 덕분에 네이버 책 소개란에서 이 책을 발견하자마자 관심이 갔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미술 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친구가 쓴 책 두 권이 떠올랐다. <그림은 마음에 담아>와 <그림의 눈빛>이다. 얼마 전에 이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을 줬다. 다급하게 문의하는 친구에게 내가 아는 범위에서 답을 해줬다. 친구가 최근에 쓴 세 번째 책을 보내주겠노라고 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아직 이번 달 희망도서를 신청하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이번 달에는 어떤 새로운 책들과 만나게 될까? 오늘 점심 시간에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