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습이란 건 내 인생에 없던 시절. 중학교 수학 시간에 처음으로 2진법을 배웠다. 0과 1로만 이루어진 그 수의 세계가 무척 신비로웠다. 이어서 3진법, 5진법도 배웠지만, 처음 낯선 세상에 발을 딛게 해 준 2진법만큼이나 신선하진 않았다. 2진법 문제는 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깊었다.
20년 전, 2진법 세상을 좀 더 깊이 만났다
현재 직업을 거머쥐기 위한 시험을 치른 후, 불합격에 대비해서 다른 시험을 준비했다. 보험용으로 준비하던 시험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가산점이 높았던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다. 비주얼 베이직이란 컴퓨터 언어를 비롯해 5과목을 공부해야 했다.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단지 시험용 공부에 불과했지만,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배운다는 사실 만으로도 흥분됐다.
3일 전, 파이썬을 만났다
컴퓨터 언어와 무관한 업종에 종사한다. 파이썬을 배울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C언어, 자바와 더불어 3대 기초 코딩으로 분류되는 파이썬의 정체가.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분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중인데, 그 인공지능의 출발점인 코딩을 어렴풋하게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존경한다, 코딩하는 분들
이틀간 교육을 받고, 오늘 마지막 교육을 앞두고 있는 내 심정이다. 20년 전만큼 내 두뇌는 명민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물론 세월의 흔적 탓만은 아닐 게다. 20년 전에는 직장을 꼭 구해야 한다는 절실함 덕분에 더 빠른 결실을 거뒀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단 며칠짜리가 아닌 한 달짜리 수업을 들었고, 수업 후에 예복습도 건너뛰지 않았더랬다.
이번 수업은 기본 개념을 들을 때는 알 것도 같았지만, 방대한 분량의 새로운 개념을 휘리릭 설명하고 지나갈 때는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응용문제를 이어서 풀어갈 때는 기초가 튼튼하지 않기에 휘청거렸다. 코딩 수업이 아니라 영타 연습 시간 같았다. 평소보다 오타도 많이 나서 수업을 들을수록 더 심드렁해졌다.
20세기 전 라이프니츠는 동양 음양사상에서 영감을 얻어 2진법을 발명했다
동양의 철학적인 사상에서 비롯돼 탄생한 2진법 덕분에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됐다. 근대 서구 문명의 초석인 수학, 특히 2진법 탄생의 심연에는 이렇게 동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이트헤드를 비롯해 수학을 단순한 수의 집합이 아닌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이도 많다.
0과 1이 서로 다르지만 0을 입체적으로 돌리다 보면 1과 같아질 때가 온다. 이 점에 착안해 컴퓨터 온오프 디자인이 탄생했다. 수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끈 사색의 저변에 동양 사상이 함께 했지만, 지금 대다수 동양국가들은 전반적으로 서양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를 힘겹게 따라가고 있다.
예컨대, 시스템반도체에서 설계 없이 제조만 하는 파운드리 분야에서 한국은 대만 다음으로 세계 2위다. 메모리 반도체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제조 인프라를 갖춰둔 덕분이다. 안타깝게도 반도체 설계를 하는 팹리스 분야 성적표는 초라하다. 퀄컴, 브로드컴같은 기라성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세계 1위 왕좌를 두고 치열하게 다툼하는 동안, 한국의 팹리스 세계시장 점유율은 고작 1%대다.
생각하지 않고 손발만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
이정동 교수님은 <축적의 길>에서 우리나라에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지적했다. 나 역시 이 대목을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기초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런데 막상 단 이틀 파이썬 수업을 들으며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 해 보니 어렵다. 기초 중의 기초 컴퓨터 언어를 배우면서도 단 몇 줄짜리 코딩을 못 짜서 낑낑거리고 나니, 그동안 나는 비판대상이 아닌 것처럼 손가락질하는 그룹에 동참해온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나 정도면 그래도 미래사회를 이끌 핵심인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박은 되지 않을까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전혀 아니올씨다였다.
10진법, 20진법
우리가 10진법을 쓰는 이유는 손가락이 10개라서라고 한다. 만약 손가락이 8개였다면 8진법을 썼을 것이다. 프랑스어 숫자 공부를 할 때 흥미로웠던 건 20진법을 바탕으로 수를 표현한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80은 4 곱하기 20이란 식이다. 직장 동료분 중 한 분은 이걸 배우자마자 프랑스어에 정이 떨어져 불어공부를 포기하셨다는데 난 다른 언어에서 찾아보지 못한 특징이라 참 매력적인 언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오늘 9시부터 5시까지 마지막 파이썬 수업을 듣고 나면 과제가 주어진다. 과제를 잘 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난 그저 오늘 밤 8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되는 불어 수업이 기다려질 뿐이다. 아, 그리고 보니 파이썬 교육을 받느라 밀린 회사일을 하느라 주말 내내 불어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