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저녁으로 먹은 게 내 몸에 잘 맞지 않았나 보다. 하루 종일 녹초가 돼서 귀가하면 몸에 나쁜 음식들이 더욱 먹고 싶어 진다. 피곤한 신체를 보양식으로 아껴줘도 모자랄 판에 웬 부조화인지 모르겠다. 오늘 저녁 주인공으로 선정된 주재료는 밀가루다.
느지막한 퇴근길
현관문을 열면 익숙하게 들려오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없다. 큰아이 방문을 열어보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치른다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서두르더니 피곤했나 보다. 생각해보니 아들은 학원 가는 날이다. 아들 학원길 라이드를 도와주느라 남편도 집을 비웠다. 막내는 태권도 학원이 끝난 후 친구들과 놀고 있나 보다.
밥친구가 없으니 가볍게 먹을 걸 고르게 된다
마침 짜장라면 빈 봉지가 눈에 띈다. 갑자기 짜장면이 땡긴다. 한 그릇을 배달 주문할 수는 없으니 내 선택은 결국 짜장라면이다. 한 봉지로는 공허한 마음과 빈 속이 채워지지 않을 것 같으니 과감하게 두 봉지를 뜯는다. 마침 딱 두 봉지 남았다. 회사 동료분이 추천해준 유튜버 '슈카' 동영상과 넷플릭스 '개미는 오늘도 뚠뚠'을 보면서 천천히 저녁을 먹는다. 한 봉지 절반까지는 포만감을 느껴가며 맛있게 먹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맛은 못 느끼고 의무감으로 간신히 먹었다.
배는 부르지만, 후식 배는 따로 있다
오늘의 선택은 쵸코가 듬뿍 첨가된 아이스크림이다. 늘 남편의 보금자리라 좀처럼 내게 기회가 오지 않았던 소파도 텅 비어 있어 느긋하게 후식을 즐기기에는 그만이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아이스크림을 음미하고 있으니, 막내딸이 드디어 집에 들어온다. 굴러다니는 짜장라면 봉지를 보더니 씩 웃는다.
엄마도 짜장라면 먹었네?
무슨 일인지 라면 봉지 뒷면을 유심히 살펴본다.
"흠, 엄마가 먹은 라면 유효기간은 2020년 9월까지였네요. 제가 먹은 건 2020년 6월까지였어요. 먹다 보니 맛이 이상해서 봉지를 살펴보니 유통기한이 지났더라고요."
"유통기한 지난 라면이 왜 아직 있지?"
"아빠한테 유통기한 지난 라면을 왜 안 버리고 놔뒀냐고 하니까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뭐라고 했는데?"
어, 봤어?
"아빠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네. 유통기한 지난 걸."
"그러니까요."
남편은 평소에도 유통기한에 너그럽다. 유통기한은 말 그대로 유통될 수 있는 기한에 불과하다며. 그럼에도 반년 이상 지난 건 상식 밖이다. 주중 살림은 전업주부인 남편에게 온전히 맡기고 주말에만 살림하는 시늉을 냈더니 이런 불상사가 초래됐다.
퇴직하면 반려견과 반려묘를 꼭 키워야겠다
이번처럼 외로움과 공허감을 달래느라 정신 못 차리고 아무거나 먹지 않도록.
좀 더 찾아보니 라면은 포장지 훼손이 없다면 8개월까지는 괜찮다고 한다. 물론 면발의 식감이 떨어지는 단점은 감내해야 한다. 신체건강이나 안전상 아무 문제가 없는 유효기간은 8개월이라고 한다. 이것까지 계산해서 남편이 라면을 남겨뒀구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찝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