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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Feb 28. 2021

빨간 얼굴

네 얼굴 무섭도록 빨개

초등학교 4학년 삼촌뻘 먼 친척분이 내게 건넨 말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던 시골길을 걷다 우연히 만났더랬다. 원래도 늘 홍조를 띠던 얼굴이었는데, 센 바람을 맞으면서 얼굴 모세혈관이 확장된 탓이다.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 게 싫었던 난, 굳이 이런 걸 들먹이는 삼촌이 싫었다.


안면홍조

40여 년 남짓 나를 따라다닌 콤플렉스 중 하나다. 안면홍조에 얽힌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10대 시절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나의 붉은 얼굴을 종종 유머 소재로 삼았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이름만 불러도 붉어지는 내 얼굴을 신기해하면서 수업 시간마다 내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어느 날 내 얼굴이 붉어지지 않자, 왜 오늘은 얼굴이 붉어지지 않냐며 반문하셨다. 물론 그때부터 내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고, 선생님은 매우 만족스러운 웃음을 씩 지으며 수업을 이어 진행하셨다. 수치심은 온전한 내 몫으로 남겨졌다.


언니, 내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 그거예요

20대 신림동에서 한참 시험 준비를 하던 시절, 함께 공부하던 제일 친한 언니가 내게 말했다.

"오늘 우리 선화 얼굴, 무척 빨갛네."


이 말을 한 언니는 내 본명이 아닌, 집에서 어릴 적부터 부르던 예명을 알고 있고, 그 예명으로 나를 부르는 몇 명 안 되는 소중한 이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이라도 나의 가장 민감한 지점을 지적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냥 씩 한 번 웃고 가볍게 넘기면 될 상황을 미친 듯이 격하게 반응해서 언니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나의 반격에 언니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난 이성을 잃었고, 언니와 한동안 교류하지 않았다. 내 밴댕이 반응에 착한 언니도 화가 나서 우리 관계는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화도 금방 내지만 화도 금방 풀리는 내가 노력할 차례였다. 김밥 여러 줄을 정성스럽게 싸서 김밥 위에 깨까지 살살 뿌려 언니에게 주면서 간신히 언니 화를 풀었다. 그런데 언니가 또 내 감정의 빗장을 건드리려고 한다.


"아니, 나는 우리 선화 얼굴이 붉어지는 게 귀여워서..."

"아, 언니 제발 그만!!"


강 00, 술 한잔 했나 보네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는데, 십수 년 전 나는 야근할 때면 화장을 지우곤 했다. 어느 날 화장 지우고 안경까지 쓴 내 모습을 본 상사께서 불콰한 내 얼굴을 보고 하신 말이다. 신성한 근무 중에 누가 약주를 한단 말인가!


"저, 술 안 마셨거든요!"


그 뒤로 사무실에서 화장을 지우는 만행(?)은 더 이상 저지를 수 없었다. 나의 30대, 붉은 얼굴에 얽힌 웃픈 스토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한국 물이 좋긴 좋은가 봐, 얼굴이 하얘졌어

박사과정 디펜스를 위해 캐나다를 다시 찾았을 때 친하게 지내던 아이 친구 엄마들과 잠시 만났다. 캐나다에서 지낼 때와 사뭇 달라진 내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캐나다에서는 내 붉은 얼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이들이 없었다. 덕분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당당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후에 귀국해서 내가 한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게 됐다. 햇살 강한 그곳에서 선크림조차 안 바르고 직사광선과 자외선에 고스란히 내 소중한 피부를 노출시키다니.


남편의 마이너스가 늘어나는데 대한 소심한 복수로 나 자신에게 100만 원 남짓을 투자하기로 결심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부과를 방문했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다 안면홍조를 치료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치료를 받은 후, 치료 덕인지, 이제 더 이상 얼굴이 붉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 덕분인지, 한국의 커버력 좋은 화장품 덕분인지 예전만큼 얼굴이 쉽게 붉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내 속사정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싶진 않아서 달라진 내 피부를 칭찬하는 엄마들 앞에서 수줍은 듯 웃는 걸로 대신했다.


엄마, 화장하니 얼굴이 하얘졌어요

잠깐 외출하기 위해 파우더를 살짝 발랐더니 피부톤이 정리됐다. 눈썰미 좋은 막내딸이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한다.


30대까지 세상에서 제일 이해 못하는 화장법이 볼터치로 발그레한 뺨을 만드는 거였다. 늘 볼이 붉어서 영어 이름은 붉은 장미를 연상시키는 Rosy를 즐겨 쓰고, 친구들과 빨간 머리 앤으로 역할극을 할 때면 뺨 붉은 다이애나는 늘 내 몫이었다.

 

나의 40대는 더 이상 붉은 얼굴 노이로제에 시달리지 않는다. 쉽게 얼굴색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에 특별히 중요한 행사나 긴장되는 공식일정이 없을 때는 화장도 옅게 한다.


마스크를 벗는 감동스러운 그 날, 아마도 살짝 볼터치에 도전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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